'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에 해당하는 궁시렁 632

  1. 2008.08.27 요청하신 책은 대출중입니다. 14
  2. 2008.08.27 Cp. Casey 12
  3. 2008.08.27 잊고 있었던 IE의 열등함 20
  4. 2008.08.25 올림픽 선수단 환영식 누구 아이디어냐 9
  5. 2008.08.24 2주가 넘게 메일은 불통 4
  6. 2008.08.23 믹시 구독함이 파폭에서는 잘리는 현상 6
  7. 2008.08.21 일기장 10
  8. 2008.08.21 4000 hits 12
  9. 2008.08.20 넝마 종이의 페스트
  10. 2008.08.20 나이 마흔넷에 방울모자 쓰고 다니는 공장장 10
우울한 딱따구리님의 추천 도서 Plan B 3.0과 매직보이님의 추천 도서 노트의 비밀을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가려다 저번에 중도에 갔다가 허탕친 게 기억나서 책이 있나 미리 조회를 해보니, 두 권 다 없다!

그런데 지정도서실은 어디지...?


공교롭게도 반납예정일이 똑같이 9월 1일인 걸 보니 한 사람이 빌려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ㅎㅎㅎ
누가 언제 나꿔채갈지 모르니 두 권 다 예약을 해 두었다.


- 지금 공부는 안 하고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 시간이 있어?
- ...;;;

Cp. Casey

The Universe 2008. 8. 27. 01:44


사실은 동두천의 한 블럭짜리 신시가지 지행역 앞. (Cp. Casey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아래)
성한이형은 이제 PCS, 다음 오더는 버지니아로. DC에서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보니 아마도 Ft. Lee일 것 같다. (그냥 때려맞춤)


후진 카메라라 사진이 이 모양이다. -ㅅ-;;;
띠용님의 블로그에 발생한 에러때문에 IE탭을 눌러 IE로 전환해서 내 블로그를 보니,
럴쑤!

파폭만 쓰느라 그 동안 잊고 있었던 IE의 조잡한 이미지 렌더링에 대한 기억이 불사조처럼 되살아났다.

원본 크기보다 12.8% 줄었을 때의 이미지 렌더링. 왼쪽이 IE7, 오른쪽이 FF3이다.


GnF 게시판에 올린 사진은 가로 780픽셀이 기준이다. 모니터의 가로 길이가 1024픽셀이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는 780픽셀이면 화면에 사진이 꽉 차는 크기였지만 1280픽셀 모니터에서는 적당한 좌우 여백이 생기는 정도의 크기라 더 키우지 않고 계속 이 사이즈로 줄여서 올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스킨 편집을 지원하지 않으면서 게시판 가로 길이보다 긴 이미지는 가로 길이에 이미지를 맞추어 리사이즈 해주는 제로보드의 멋진 기능을 들여올 생각은 (추호도) 없는 텍큐닷컴에 사진을 옮겨오다 보니 많은 사진이 640픽셀(그나마 기본 스킨들 중 가장 큰 가로 길이)로 고정되며 쭈그러들어 버렸는데, 단지 크기가 줄어들었을 뿐 그닥 나쁜 점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 사진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사진들을 IE로 보니...

이건 도트식 프린터와 레이저 프린터의 차이 같구나! 이게 뭐냐!!! (버럭!) 하다가 그제야 제로보드의 멋진 이미지 리사이즈 기능에 힘입어 사진을 시원시원 큼지막한 크기 그대로 올렸더니 IE는 쭈그러든 이미지를 저렇게 싼티나고 볼품없게 처리하기 때문에 뽀샵질 해가면서 사진 크기를 줄여서 올렸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파폭처럼 부드러운 이미지 렌더링을 할 수 있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안 해도 됐겠지.

나는 이제 파폭만 쓰니까 상관 없지만 아직도 IE를 쓰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사진이 걸려있을 생각을 하니 빨리 스킨을 수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텍큐닷컴에 볼썽사납게 징징대며 떼쓰고 싶은 생각이 정말이지 굴뚝같다.



+ 어쩐지 오늘따라 카운터가 빨리 올라간다 했다. 올블에서 추천 좀 받았군하 ㅎㅎㅎ
그런데 분명 추천이 네 칸이었는데 내가 추천을 눌러보니 두 칸으로 줄어버렸음.
이거 뭥미 -ㅅ-;;;

장미란 선수, 박태환 선수, 최민호 선수, 남현희 선수, 유원철 선수, 오상은 선수, 이주형 코치, 그 외 수많은 관계자들의 저 표정을 보라!!!

소나기 오는데 목발 짚은 선수까지 시내를 카퍼레이드도 아니고 걷게 만드는 이 미친 아이디어의 주인공은 노태우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 있던 이연택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뒤통수가 따가운지 왼쪽 구석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군)

황경선 선수가 이 짓 하려고 금메달 딴 게 아닌데 ㅡㅡ;;;


이게 정녕 결혼을 발표한 새신부의 표정이란 말인가 -_-;;;


이건 귀국 후 기자회견 장면인데 무조건 꼬투리 잡는 것도 보기 싫다는 누군가의 의견이 있었지만 나 같아도 이 정신나간 구보 퍼레이드 할 생각하면 저절로 저렇게 얼굴이 짖이겨지겠다. -_- 단체로 기자회견 할 때 방긋 웃는 사람 없다는 둥 늦게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표정이 저런지 네가 본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냐는 둥 이런 리플 달고 있는데- 고파스에도 참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모여있음.

올림픽에 국민들이 정신줄 놓고 있는 동안 빛나리 전을 추종하는 명바기는 자기한테 쏠리던 악플 아주 조금 줄어서 좋겠네?

텍큐닷컴으로 넘어오면서 블로그 주소를 내 도메인과 같이 가져가기 위해 서브도메인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는 몰랐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원래 내가 호스팅을 맡긴 비누넷에서는 도메인의 네임서버를 비누넷으로 옮기라고 했고, 그 도메인으로 메일 주소도 하나 만들어서 핫메일로 포워딩해 놓고 쓰고 있었는데, 이번에 서브도메인 때문에 도메인의 네임서버를 비누넷에서 도메인을 구입한 업체로 옮기면서, 네임서버를 옮기더라도 텔넷이나 db 접속에는 문제가 없다길래 그런 줄만 알고 있었지-
그 와중에 핫메일로는 메일이 한 통도 오지 않고 있었는데, 블로그 주소를 바꾸면서 여기 저기 물어보고 쿼리 넣고 따진 게 많았는데 답멜이 하나도 없어서 조금 뾰로통하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전에 텔넷에 들어갔다가 메일 주소가 내 도메인 메일에서 지메일로 바뀌어져 있는 걸 보고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 내 주소로 메일을 보내보니 반송되고 말았다.

 

이게 뭐야!!! 어쩐지 메일이 하나도 안 오더라!!! 하면서 비누넷에 물어보니, 메일은 네임서버가 있는 곳에서 서비스를 받는 거라며 mx 레코드를 변경하라고만 알려주었다.

 

어째서 네임서버를 바꿀 때 메일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은 거야!!! 그 동안 온 메일은 네트워크의 먼지로 사라진 거잖아!!!

 

라고 겉으로 티 안나고 최대한 공손하게 눈물을 두 방울 또로록 흘리니, 부득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만... OTL

 

어쨌거나 도메인 업체에게 토욜에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고 세팅을 부탁했는데 이틀이 다 지나도록 메일은 먹통이다. 내가 뭘 잘못 설명한 건가... -_-;;; 괜히 서브도메인으로 연결해서 테크노라티에는 등록도 안 되고(똑같이 호스트를 찾을 수 없다는 에러 메시지를 토해내는 걸 봐서는 문제의 원인이 같은 것 같은데) 말썽만 생기나... ㅠㅠ

 

 

 

+ 25일 저녁부터 멀쩡해졌습니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_@ ㅎㅎㅎ

크랭님이 알려주신 믹시 구독함을 이용해 보려고 했는데, 시키는 대로 폴더를 만들고 블로그를 추가했더니 화면이 이렇게 나왔다.

FF 3.0.1이 토해내는 화면


보이는 것처럼 내용이 미처 다 보이지 않고 중간에 잘려버린다.

그래서 파폭이라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한국에서 파폭을 사용하는데 필수 부가기능인 IE탭을 눌러보니-

IE7이 토해내는 화면


오호. 역시나 제대로 나오는군.


버그 신고를 메일을 보내서 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블로그에 올리냐 하면...

그냥 효근님의 관심 1g을 받고 싶... (응?)
다기 보다는 믹스업을 받고 싶... (뭐?)
은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흠흠.
믹시와 관련된 페이지 하나라도 더 만들어서 믹시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을 표현... (아, 그만해야겠따 ㅡㅡㅋ)


+ 믹시도 favicon을 사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는데, 며칠 뒤면 적용될 거라고 하셔놓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효근님! 저는 베타3까지 기다릴 수...
++ 믹스업캐스트에 나오는 제 대표 블로그를 6963으로 바꿔 주세요오오오!!! (흠... 이것도 한 번 얘기했었는데 플래시라 당장 수정이 어렵다고 했었던가 ㅠㅠ)

일기장

Mostly Harmless 2008. 8. 21. 18:09
이제는 어린이가 더 이상 하나의 마법적 대상물(거기에 수많은 기억과 감동이 서린)에 거의 한 생애를 바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냉정해 보인다. 어떻게 일기장 없이, 또는 기념물도 없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안젤로 오르소 이야기, 1992



수많은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국민학교(아... 내가 국민학교의 마지막 세대인가?) 다닐 때 일기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방학 일기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등학교(낯간지럽군 -_-ㅋ) 일기장은 다 쓰기가 무섭게 (아마도 통쾌한 기분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기록을 보관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가끔 자신의 옛날 일기장을 스캔해서 올려놓는 블로그를 보면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적어도 사료(응?)의 역할은 충실히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충격적인(?) 기억은 1학년 때 가장 처음 썼던 일기이다. 밤에 엄마랑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탔는데, 내가 굉장히 높이까지 올라가서 엄마는 놀랐다- 는 서너줄 정도의 짧은 일기였는데, 셀 수 없이 사라지고 왜곡된 기억 중에 지금까지 뇌 한 구석에 이 기억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선생님이 내 일기를 보시고 일기에 제목을 붙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목(<놀이터> 였던 것 같다)을 붙였나며 굉장히 놀라셨기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처음 쓴 일기에 꺽쇠까지 붙여가며썼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무려 8살 때 일 아닌가!
그런데 좋은 기억은 이것 뿐이고, 나머지는 아빠가 일기를 검사하고 마구 혼내서 안 좋은 기억 뿐이다. 5학년 때는 중창부를 '가운데 창문'이라고 썼다가 혼났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노인은 낚시줄만 버리게 되었다.' 라고 썼다가 혼났다. 6학년 때는 미국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도이칠란트에 3:2로 진 경기를 일기에 쓰면서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썼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혼났다.
글씨를 제대로 안 쓴다고도 혼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내 글씨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피오피체와 개성체를 섞어놓은듯한 모습이었는데, 아빠는 궁서체로 쓰라고 버럭하고 으르렁대며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게 했다. 물론 나는 궁서체 글씨를 쓰라면 쓸 수 있었는데(4학년 때는 교실 뒤 조그만 칠판에 쓰기 책에나 나올법한 궁서체 글씨로 공지사항 같은 걸 쓰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왜 선생님은 자기가 안 쓰고 날 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손이 굉장히 아프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간단히 말해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데, 웃기는 건 감수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시기에 진입하다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일기장(얇은 공책 형태가 아니라 두꺼운 표지에 대략 정사각형 모양의 다이어리)에 공들여가며 비밀스런(!) 이야기를 끄적대더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펼쳐보면 신경질이 나서 뼈와 살을 분리시키고 싶을 정도로 유치찬란하다. -_-;;; 이런 건 그냥 고이 간직만 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ㅋ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너도 나도 다이어리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즉석 스티커 사진과 다이어리 꾸미기 전용 스티커가 유행하고 마치 방명록에 글 남기듯 남의 다이어리에 글을 써 주며(참나... 이게 뭐하는 짓이지? ㅋ) 갖가지 디자인의 속지, 엽서, 출처가 불분명한 책에서 따온 글, 친구들의 삐삐 번호가 적힌 전화번호부(응?)가 난무하던 때였다. 나는 지갑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갑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날마다 할 일과 한 일을 꼼꼼히 정리하던 시절은 2년 남짓이었고 특히 대학에 입학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나서는(특히 궁시렁 게시판) 다이어리는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두꺼운 지갑(그렇지만 모든 것이 들어있는)과 동의어가 되었다. 쓰지 않아도 관습적으로나마 달고 다니던 주간 일정(올해와 작년 아카이브를 합쳐 대략 52장 필요)은 3학년이 되면서 간편한 월간 일정(13장 필요)으로 바꿔 버렸다.

작년에 9년 동안 들고 다닌 다이어리를 영영 잃어버린 이후로는 난생 처음 지갑을 쓰고 있다. 하지만 한동안 손이 허전하던 걸 빼면 불편한 건 없다. 아카이브의 역할은 제로보드가, 이제는 포맷을 바꿔 블로그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질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어 제 기능을 하고 있으니.

4000 hits

Mostly Harmless 2008. 8. 21. 10:43

1시간마다 방문자수가 업뎃되는 텍큐닷컴의 특성때문에 우연히 운 좋게도 줍게 된 4000 hits.
(사실 이런 것까지 챙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카운터에 천 단위로 딱 떨어지는 숫자를 나도 처음 봐서...;;;)
서기 2080년경 "넝마 종이1의 페스트"가 수집가들의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아마 아시아의 어느 머나먼 지방에서 유래한 박테리아(학명은 코메스토르 린테이 시넨시스Comestor lintei sinensisi)가 서구 세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넝마 종이를 훼손시켰다. 말하자면 구텐베르크 시절 이후부터 19세기 중엽, 즉 섬유소로 생산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할 때까지 제작된 모든 책이 대상이었다. 정말로 멋진 운명의 장난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는 목재로 만들어진 종이는 70년이 지나면 썩지만, 그와 달리 넝마로 만들어진 종이는 당당하게도 썩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써 오래 전부터 전 세계의 출판인들은 '중성지'로 만든 고급 책을 생산하고 있었다. 따라서 목재 종이는 아주 깨끗한 고서적들의 신선하고 바삭거리는 넝마 종이에 저항하면서, 오랜 세월에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2080년 경에 이르러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목재 종이는 세월에도 끄떡없게 되었을뿐 아니라, 과거에는 인쇄업자들의 영광이었던 넝마 종이는 전 세계의 도서관에서 코메스토르 시넨시스의 음울한 활동과 함께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맨 먼저 "히프네로토마키아 필리폴리"2 ii의 모든 판본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좀이 슬기 시작했다. 이어서 종잇장들은 아주 가느다란 거미줄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엄청나게 값비싼 종이들이 완전히 분해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학자들의 노력도 소용없었고, 볼록 판형을 만들어 구원해 보려는 불쌍한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책들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아델피 출판사의 "필리폴리" 새 판본(현재 가격으로 1천 글로볼, 그러니까 20세기의 돈으로는 대략 1백만 달러는 호가하는)은 거의 거미줄 같은 페이지를 드러냈고, 최소한 글자의 절반 정도는 이미 상실되었다.
이어서 뉘른베르크의 연대기, 포레스티의 부록들, 타소와 아리오스토 작품의 초판본들, 1623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2절판 책들, "백과사전" 전집들이 희끄무레한 구름이 되어 세계의 대규모 도서관에서 이미 황량해진 열람실들에 떠다니고 있었다. 사방에 늘어선 벽들은 모든 보물을 빼앗긴 서가들의 텅 빈 커다란 눈과 함께 그 죽음의 날갯짓을 응시할 뿐이었다.
문화적 상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재난의 즉각적인 경제적 타격은 실로 엄청났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의 가장 음울했던 몇 달 동안처럼, 크라우스3 가문의 상속인들은 뉴요크 5번가의 길모퉁이에서 사과를 팔았고, 베른르 클라브레유4는 센 강변을 따라 오렌지 껍질을 쓰레기통에 주워 담고 있었으며, 런던의 가장 하층 빈민가에서는 파무어 경과 콰리치사5의 직원들이 비쩍 마른 몰골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안개, 불붙은 석탄의 불티가 바람에 흩날리는 가운데 배회하고 있었다. 한 쪽 신발은 굽이 떨어져 나갔고 낡은 긴 외투는 더러운 헝겊을 덧대어 누더기가 되었으며, 한 손으로는 병든 아이를 붙잡은 채 행인들에게 자선을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스크루지 아저씨처럼 무관심하고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재난에서 품위있게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은 마리오 스코냐밀리오6였다. 그는 로고메도7의 어느 빵집에서 특별히 만드는 나폴리식 파이의 소매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는 동안 수집가나 서적상 모두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수집가들은 본능적인 수집 욕심에 이끌렸고, 서적상들은 합리적인 '아우리 사크라 파메스'8에 이끌렸던 것이다. 고서적 시장은 근대 골동품을 중심으로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니까 "집 없는 천사"와 쥘 베른의 하드커버 판본들에서 아주 최근의 작품들까지 그 대상이 되었는데, 최근 작품들은 출간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벌써 골동품이 되었다(특히 인터넷과 전자책의 승리와 함께 인쇄된 책은 이제 애호가나 실리콘 알레르기가 있는 독자만을 위해 아주 제한된 부수만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안니발레 로시의 시집, 존 스미스의 소설, 브람빌라의 경구 모음, 파우타소의 평론집, 로몰레토 피치고니 또는 살바토레 에스포시토의 전집은 벌써 수천만 달러iii를 호가하게 되었다. 20세기 90년대의 어느 잔인한 인물의 책은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3백만 달러에 팔렸는데, 일본의 어느 은행이 구입하였다.
물론 그것은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지 않은 판본들이었다. 사실 이제는 골동품 시장의 옛날 법칙을 뒤엎는 또 다른 현상으로서 '비교류 판본non-association copy'이 특히 높게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달리 과거의 작품에서는 가령 '저자 기증'이라는 자필 헌사가 붙은 키르허9 신부의 책은 진본 또는 탁월한 희귀본으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베빌라쿠아10에게 헌정한 코르델리11의 책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골동품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20세기 중엽부터 작가가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작업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1) 출판사 사무실에서 언론(기증 도서), 비평가와 언론 지도자들을 위해 최소한 1백 부에 서명하고,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들, 스트레가 문학상12, 비아레조 문학상13의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중에 캄파엘로 문학상14의 민간 심사위원이 될 수도 있는 베네치아 지역의 환경 운동가나 노동자들에게 나눠 줄 몇백 부에다 서명하는 작업, 2) 이탈리아 100대 도시의 수많은 서점에 앉아서 그곳에 있는 독자 대중을 위해 서명하는 작업, 그리고 3) 서점 상인들을 위한 수천 부에 서명하는 작업. 그런데 서적상들은 나중에 단골 고객들에게 그게 유일한 책이라고 장담하면서 은밀하게 가격을 올려 팔곤 했다. 간단히 말해 실질적으로 인쇄된 책 전체에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게 되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비평가나 기자, 심사위원, 친구들은 서명된 책을 받으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거나, 또는 감옥(감옥에서는 책장을 마리화나 담배를 마는 데 사용했다)이나 병원(병원에서는 그곳에 서식하는 쥐들이 갉아먹었다)에 기증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해 보면 서명된 책의 유통 부수가 너무 많아졌고, 결국 가치가 떨어져 희귀본 책들의 시장에서 배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점차 교류의 흔적이 없는 극소수 판본들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2091년에 이미 피암메타 소아베사15는 철저하게 서명이 없는 올리비에로 딜리베르토16의 짤막한 시 "실비아에게"17를 5천만 달러를 매겨 목록에 올려놓았다. 서명이 없는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의 또 다른 짧은 시 "실비오에게"iv는 1억에 메디올라눔18에 팔렸다. 서명이 전혀 없이 깨끗하고, 마르첼로 델루트리19의 애정어린 서문이 실린 보렐리20의 전집(베를루스코니 출판사, 유토피아 도서관)은 2억에 프렐리아스코21의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마리오 스코냐밀리오는 나폴리식 파이 소매상을 집어치우고 자신의 책방을 다시 열었는데, 줄리오 안드레오티v의 "나의 감옥 생활"22(2001) 깨끗한 판본 하나를 2억에 팔면서 고서적 시장에 의기양양하게 복귀했다. 그 책은 바로 저자가 자신의 친구인 어느 신부(神父)에게 결혼 선물로 보낸 것인데, 일종의 액막이로 일부러 어떤 확인 표시도 하지 않은 판본이었던 것이다.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밀라노, 봄피아니, 2000






= 번역자 김운찬의 주석 =
  1. 서양에 처음으로 종이 제작 기술이 전파되었을 때, 그 주원료는 헌 마(麻)나 아마, 면 섬유 등을 넝마 형태로 수집해 사용하였다. 하지만 넝마는 수집으로 충당하기에는 부족하고 값도 비쌌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걸쳐 산업화와 함께 펄프 등 섬유소를 화학적으로 처리한 근대적인 형태의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2. Hypnerotomachia Poliphili. 콜론나Francesco Colonna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어로는 '폴리필로' 또는 '폴리필로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된다.
  3. 현재 미국의 가장 유명한 고서적 거래상들 중 하나.
  4. 현재 파리의 유명한 고서적 판매상.
  5. 1847년 런던에서 창립된 고서적과 필사본 거래 전문 회사.
  6. 1990년 밀라노에서 창간된 골동품 및 도서 애호가들을 위한 전문 잡지의 편집인이며, 고서적 전문 서점을 소유하고 있다.
  7. 밀라노의 구역 이름.
  8. auri sacra fames.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3권 57행에 나오는 표현으로 '황금에 대한 지독한 욕심'을 의미한다.
  9. Athanasius Kircher(1601-1680). 도이칠란트의 예수회 수도사.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헌학적 연구, 공상 과학적 해석, 음악, 물리학, 지질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0. Alberto Bevilacqua(1934-). 이탈리아의 작가로 수많은 작품과 함께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11. Franco Cordelli(1943-). 이탈리아의 작가로 여러 편의 소설과 평론집, 시집을 발표하였다.
  12. 1947년 일단의 문인들이 로마에서 창립한 문학상으로 매년 현대 소설 작품 중에서 한 편을 골라 시상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꼽힌다.
  13. 1930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주요 문학상 중의 하나.
  14. 1963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문학상.
  15. 현재 로마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16. Oliviero Diliberto(1956-). 현재 이탈리아 공산당 계열의 하원의원.
  17. A Silvia. 이 시는 원래 레오파르디의 서정시로 유명하다.
  18. 현재 밀라노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19. Marcello Dell'Utri(1941-). 정치가로 1994년 '힘내라 이탈리아Forza Italia'당의 창당 멤버였고 1996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1999년에는 유럽의회의원, 2001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 Francesco Saverio Borreli. 밀라노의 검찰청장으로 1992-1998년에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깨끗한 손Mani Pulite'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21. 현재 토리노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22. Le mie prigioni. 원래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펠리코Silvio Pellico(1789-1854)의 옥중기.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감동적인 작품으로 1832년에 출간되었다.


= 궁시렁의 추가 주석 =
  1. 아시아라고 하면 1순위로 갖다붙이는 것이 중국인 것은 에코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ㅅ-;;;
  2. 움베르토 에코의 최신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주인공인 얌보의 박사 논문이 이 작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3. 그러니까 미래의 화폐 단위로 따지면 수만 글로볼이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이 뒤로도 글로볼은 나오지 않는다.
  4.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는 밀라노 검찰청장 시절 깨끗한 손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장관직을 거쳐 정치가로 변신, 현재 유럽의회의원이며 부패 척결을 모토로 하는 이탈리아 가치당(Italia dei Valori)을 이끌고 있다. 실비오란 물론 이탈리아의 최고 부자이자 AC밀란 구단주면서 깨끗한 손 운동을 피해 힘내라 이탈리아당을 창당한 뒤 온갖 정경유착 의혹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국무총리를 지내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말한다.
  5. 총리를 7차례, 장관을 36차례나 역임했으나 깨끗한 손 운동 이후 열린 1994년 총선에서 패배한 뒤 2억5천만리라(1억3천만원)의 불법 정치 자금 조성혐의로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 이럴수가!!! 이 쾌활하고 명랑한 글이 움베르토 에코가 쓴 게 아니라 더글러스 애덤스의 컴퓨터에 꼭꼭 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발표된 거라고 해도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믿을 것이다. ㅋㅋㅋ
방울모자 쓴 DJ 철민 (44세)

2262*1794 사이즈입니다. 클릭해서 보세요.


2008년 2월 23일 워커힐 비스타홀에서 열린 2008 차카게 살자 "포스 작렬" 파티에서 DJ 철민으로 분한 승환옹.
나이 마흔넷에 방울모자 쓰고 해맑게 웃으며 동안을 드러내놓고 뽐내고 있다.

사진은 권현주님이 드팩 창고에 올리신 것이다. (보정 하나도 하지 않은 원본이라 실제 피부 그대로- 라고 한다.)




나는 17년 뒤에도 저렇게 방울모자 쓰고 다닐 수 있을까...? ㅇㅅㅇ (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