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자네가 총알 피하는 재주를 익혔다면 거기에서는 선망과 질시와 탐욕을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아니, 선망과 질시와 탐욕이라는 이 무기로 적과 싸워야 하네. 적이 누구이겠는가? 만인이 적이야. 내 말 명심해. 근 반 시간 동안 자네는, 자네 생각을 개진한다는 핑계로 내 말을 자꾸만 끊어먹으면서 질문을 핑계로 내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라. 특히 자네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 살다 보면 자신의 통찰력이 그럴 듯해 보인 나머지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올 게다. 손위 사람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받아들이겠지, 자네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때 충고라는 것은 하면 안 된다. 승리라고 하는 것은 패배자에게 증오의 씨를 뿌리는 법이다. 승리에 도취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해로운 것도 없다. 왕자(王者)는 아랫사람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자기를 능가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동류(同類)를 상대할 때도 늘 분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네의 미덕으로 동류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네 자신의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 자화자찬하지도 말고 자조(自嘲)하지도 말이야 한다. 자찬하면 오만하다고 할 것이고 자조하면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되고 싶으면 뭐든 되어도 좋다. 하지만 된 것이 드러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리고, 열정이 있더라도 그걸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 모두가 자네의 본심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분별이 무엇인가? 조심스러운 침묵이다. 이것이야말로 지혜의 장롱이다.

아니, 신사의 으뜸가는 미덕은, 그러면 의색(疑色)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베르토의 질문에 이번에는 시뇨르 델라 살레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 보게, 로베르토. 세뇨르 데 살라사르께서는, 현명한 사람은 가장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야. 현명한 자는 마땅히 시치미를 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 같군 그래. 세상살이에서, 마음을 터놓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야. 중요한 진실은 원래 절반씩 나뉘어 언표되는 것이 보통이거든.

시뇨르 델라 살레타의 말에 세뇨르 데 살라사르가 덧붙였다.
조금 더 말해보면 이렇다네. 가장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바보같이 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것... 살다 보면 연설할 때는 쓸 수 없는 지혜로운 말의 효용도 알게 될 것이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양을 따지는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 웅변은 모름지기 비단결 같은 언어로 짜여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야. 사려 깊은 사람이 우아한 언변까지 갖춘다면 이 언변이 그 사람을 어떤 역경에서든 구할 것이네.

로베르토에게, 뜻밖에 얻어듣게 된 삶과 지혜에 관한 일생일대의 교훈의 기회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짧은 시간에 교화되고 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두 스승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일찍이 라 그리바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는, 그 시대 수수께끼의 상당 부분을 그에게 설명해 준 셈이었다.

움베르토 에코, "전날의 섬", pp. 159-162


전날의 섬 L'Isola del Giorno Prim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6


어제 재무관리 책을 찾아보러 교보에 들렀다가 소설 코너에서 양장본 한 권을 집어들었는데, 페이지를 몇 장 넘기자마자 어처구니 없는 표기에 기가 차고 말았다.


일 주일은 문(Moon), 마르스(Mars), 메르쿠리(Mercury), 유피테르(Jupiter), 베누스(Venus), 사투르누스(Saturn), 선(Sun)으로 구분했다.
- Author Note -


월화수목금토일이다.
그런데... 응?
영어로야 Mercury겠지만 라틴어는 Mercurius 아니겠니? 메르쿠리우스라고 써야 하지 않겠니?

문과 선은 나중에야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뭥미???
나머지는 뭐하러 라틴어로 쓴 건가? 아예 차라리 다 영어식으로 쓰지? -_-;;;

그래서 이렇게 잘난 번역을 한 사람은 누구야... 싶어 맨 뒤로 가보니, 역자 후기가 있고나.


로버트 해리스만큼은 아니겠지만 역자로서도 이 책의 번역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적들과 화산학은 물론이고, 고대 로마의 건축물 구조와 각종 직책들, 특히 로마 제국의 수도 시설 등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봐야 했으며, 인명과 지명, 여러 가지 고유명사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고심해야 했다.
- 역자 후기 -


인명과 지명, 여러 가지 고유명사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고심해야 했다.
인명과 지명, 여러 가지 고유명사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고심해야 했다.
인명과 지명, 여러 가지 고유명사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고심해야 했다.


여보세요 번역가님, 지금 장난하쇼???
고심하셔서 Mercury를 라틴어로 바꾼답시고 쓰신 게 메르쿠리군요?
Dies Lunae와 dies Solis는 모르셔서 루나와 솔이라고 바꾸지 못했다고 치더라도 그렇다고 차마 달과 해라고 하기도 뭐해서 고심 끝에 그냥 영어 원문대로 이라고 하셨군요?
푸핫!


이런 번역가에게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강대진씨의 글 : 너무나 필연적인 오역에 대한 성찰


우리나라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제대로 된 번역을 보기란 (다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역시 어려운 일인가...
그래도 그렇지, 서양 문학을 한다는 사람이 영희와 철수가 바둑이를 데리고 놀러 나갈 수준의 라틴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급버럭!)



로버트 해리스의 히스토리 팩션(어익후... 굳이 역사 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팩트와 픽션이 혼재된 팩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표기법을 감안하여 멋드러지게 히스토리 팩션이라고 쓰신 것- 감사합니다.) "폼페이"를 박아람씨의 번역으로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책이다. 번역가를 랜덤으로 뽑나보지? -_-;
그런데 이거... 랜덤하우스중앙 아니었나? 베텔스만이 아예 인수한 건가?



어쨌건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은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 그래서 정말 안 읽겠다는 건가요?
- 재미있을 것 같아 어처구니 없는 표기법을 감수하고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ㅋㅋㅋ


- 읽어보니 어떻던가요?

- 절대 비추합니다. -_-

갑자기 한 여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홀든 콜필드 아냐!" 릴리언 시먼스였다. 한때 형이랑 어울려 다녔던 여자다.
"안녕하세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자리가 비좁다 보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엉덩이에 뭔가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해군 장교와 같이 있었다.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다 얘." 릴리언 시먼스가 말했다. 억지로 꾸며낸 인사말이었다. "네 형은 어떻게 지내니?"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것일 것이다.
"잘 지내요. 지금은 할리우드에 가 있어요."
"할리우드? 정말 대단하구나! 거기서 뭘 하는데?"
"전 잘 몰라요. 아마 글을 쓸 거에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형이 할리우드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의 소설을 읽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좋을 거야." 릴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같이 있던 해군 장교를 소개해 주었다. 블롭 중령인가 하는 그 남자는 악수하면서 손가락을 마흔 개 가량은 부러뜨려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난 그런 인간을 싫어했다. "혼자 있는 거야?" 릴리언이 물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웨이터는 그녀가 비켜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얘 잘 생기지 않았어?" 릴리언이 해군에게 말했다. "홀든, 그 동안 훨씬 미남이 된 것 같아." 해군은 그녀가 통로를 온통 막고 서 있다는 걸 지적하고는, 그만 자리로 가자고 말했다. "홀든, 술잔 가지고 우리 자리로 와." 릴리언이 말했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요." 그녀는 내게 잘해 주려고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형에게 그 얘기를 전하도록 말이다.
"둘러대기는. 그래. 맘대로 해. 형을 만나면 내가 증오한다고 전해줘."
그러고 그녀는 가 버렸다. 해군 장교와 나는 서로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나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니.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릴리언에게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해 버렸기 때문에, 그곳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거기서 어느 정도는 들어볼 만한 어니의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릴리언 시먼스와 해군 장교와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끔찍하게 지겨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언제나 남의 일을 훼방 놓곤 한다.

 

제롬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p.119-121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낚였(던 건 아니었)다

Life 2008. 5. 16. 22:04

(아니, 그러면 왜 일기에서는 자신과 다른 성별의 캐릭터를 내세우는 걸까?)





호연1)이 남자였다니...............!!!!!!!!!!!!!!!!!!! (내 오해임이 밝혀짐 ㅋ 호연님은 여자 맞아요. 검색하다 본명도 알아냈음. ㅋㅋ)

ㄴㅁ아ㅣ헙ㅁ댜허피ㅏ마켱ㅣㅠㅓ니아헐뮤ㅣㄴ러마니ㅓㄹ뷰ㅓㅑ배덜지ㅏㄹ버


 
뭐야... 나 책 두 권이나 샀는데...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뭔가 굉장한 사기를 당한 느낌2)이다...;;;
얼마 전에 도자기 단행본이 출간되어 나도 두 권을 사서(절대 배송료 및 추첨 이벤트에 당첨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니...ㅋㅋㅋ) 한 권은 송병렬 선생님께 스승의 날 선물로 드렸다. 포레스트는 교수님한테 만화책을 선물하는 건 이상하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엄청 좋아하셨음.3)

어쨌거나 그의 사이트. (나와 같은 byus 고객이네 ㅋㄷ)
http://gochal.byus.net/cellowife














1) 호연 : 네이버에 웹툰 도자기를 연재한 작가.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학생. 호연이라는 필명은 세종 캠퍼스의 기숙사 호연학사에서 따왔다.

2) 스노우캣처럼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얘기를 풀어가는 일기만화(의 형식이라고 내 멋대로 지금껏 생각한) 도자기의 주인공은 여자. 그래서 당연히 작가는 여자인줄 알았지!!! (새삼스레 또 버럭!)
게다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사람이 작가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이 분이 호연님 맞음 캬캬캬)

3) "보내준 책, 도자기는 재미있게 읽고 있단다. 관심있던 분야인데다가 만화의 발상이 참으로 재미있어서 푹 빠질 정도란다." 라고 하셨다.



호연 팝툰 인터뷰 기사 : http://www.poptooni.com/news/article_view.php?id=255


도자기: 마음을 담는 그릇
호연 지음
애니북스, 2008
나의 점수 : ★★★★★

해결책

And Everything 2007. 10. 14. 18:11
Solutions nearly always come from the direction you least expect, which means there's no point trying to look in that direction because it won't be coming from there.

Douglas Adams, The Salmon of Doubt, p. 243

The Salmon of Doubt: Hitchhiking the Galaxy One Last Time
Douglas Adams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2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걱정 말게, 제 시간에 도착할 거야, 하고 말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걱정 안 해요, 사위가 간신히 불안증을 감추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자네도 알잖나,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말했다. 그는 승합차의 방향을 바꿔 동네를 오가는 자동차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곁길로 들어선다. 여기 지름길로 가세나, 혹시 경찰이 우리더러 왜 이 길로 가느냐고 묻거든 우리가 미리 이야기한 대로 해, 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저기 공장에 볼 일이 있다고. 마르살 가초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중앙도로의 교통사정이 나빠질 때면, 장인은 항상 우회로를 택하곤 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장인이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너무 늦게 곁길로 꺾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걱정과 장인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아직까지 경찰의 제지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는 아버님도 내가 이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저기 공장에 볼 일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매번 나에게 일깨워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걸. 교통경찰이 두 사람을 계속 묵인해 주는 것은, 아니 친절하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우연의 연속이거나 고집스러운 운명 덕분이라기보다 마르살 가초가 입고 있는 센터의 경비원 제복때문이라는 생각은 두 사람 모두 하지 못한 듯 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까지 벌금을 물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우연의 연속이나 고집스러운 운명을 들먹였을 것이다. 마르살 가초가 진짜 이유를 알았다면, 제복이 부여하는 권위의 무게를 더 높이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진짜 이유를 알았다면, 사위와 이야기할 때 지금처럼 비꼬듯 생색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 말이 옳다. 젊은이는 능력이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노인은 지혜가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다.

 

주제 사라마구, "동굴", pp. 10-11



하지만 이 여자는 자기 몸을 가리고 있잖아요. 저렇게 몸을 가리는 건 전부 다 보여주는 것보다 더 나빠. 아버지는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눈으로 보고, 책을 읽고, 직접 느꼈으니까. 책이 무슨 상관이에요. 책을 읽으면 거의 모든 걸 배울 수 있어. 저도 책을 읽는 걸요. 그럼 너도 아는 게 좀 있겠구나. 잘 모르겠어요. 그럼 다르게 읽어야지. 어떻게요. 같은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건 아냐, 각자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내야지, 뭐든 자기한테 제일 잘 맞는 걸로, 어떤 사람들은 평생동안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종이 위에 있는 단어들밖에 읽지 못해, 그 단어들이 빠르게 흐르는 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걸 결코 깨닫지 못하지, 징검다리는 우리가 반대편 강가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중요한 건 바로 그 반대편 강가야, 다만. 다만 뭐요. 다만 그 강에 강변이 여러 개가 아니라 두 개만 있다면, 독자들이 각자 자기만의 강변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겠죠, 그러면 우리가 꼭 가봐야 하는 강변이 하나밖에 없을테니까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말했다.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하고 언쟁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또다시 보여줬어, 노인들은 항상 지게 마련이지, 비록 그 과정에서 한두 가지 배우는 게 있기는 하지만.

 

주제 사라마구, "동굴", pp. 97-98



동굴 A Caverna
주제 사라마구 지음 / 김승욱 옮김
해냄출판사, 2006
현대의 직업활동은 가족을 독특한 모양새로 발전시켰다. 뛰어놀 공간도 맑은 공기도 부족한 베네치아의 아이들에게는 꼬박 세 달의 방학이 있고, 그건 온 가족이 하루하루를 해변에서 보내는 정당한 사유가 되어준다. 그리고 긴 여름의 모권사회가 무리 없이 작동을 시작한다. 할머니, 숙모, 엄마가 교대로 돌아가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감시하고, 사이사이 휴식을 취하고 선탠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아주 유유자적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이 전원 풍경의 일원이 되는 할아버지들은 있을지 몰라도 아빠들은 당연히 회사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 베네치아 사람들보다 덜 행운아인 이탈리아 다른 도시의 아빠들은 느긋하게 쉬고 있는 가족을 찾아 금요일마다 끔찍한 정체를 뚫고 바다까지 돌진해야 한다. 그나마 베네치아 아빠들은 퇴근 후 해수욕을 즐기거나 보치아 한 게임에 낄 수도 있다.

디어크 쉬머, "비바 베네치아", p. 129

Viva 베네치아: 꿈꾸면 신나는 그 곳 Leben in Venedig
디어크 쉬머 지음 / 장혜경 옮김
푸른숲, 2006
"으으으으..." 아서가 말했다. 그가 눈을 떴다. "깜깜해."
"그래. 깜깜해." 포드 프리펙트가 말했다.
"빛이 없어. 깜깜해. 빛이 없어." 아서 덴트가 말했다.
포드 프리펙트가 인간들에게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 중 하나가 무지무지하게 명백한 사실을 계속해서 말하고 반복하는 괴상한 버릇이었다. 가령 '날씨가 좋군' 이라든지, '키가 크시네요' 라든지 '그래서 이걸로 끝이군. 우린 죽는 거야' 아니면 '맙소사, 1미터는 떨어진 것 같은 꼴이구나. 괜찮니?' 같은 말들이 그랬다. 처음에 포드는 이 기이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론을 만들었다. 인간은 계속해서 입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입이 시들어빠지나 보다 생각한 것이다. 몇 달 동안 관찰과 고찰을 해본 끝에, 그는 이 이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정립했다. 인간은 계속해서 입을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 이론 역시 단념했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냉소주의도 포기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인간을 좋아한다고 결론지었지만, 이들이 모르고 있는 그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지독하게 걱정스러웠다.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p. 84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주위의 독촉과 압력을 받고서야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입담을 풀어내던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제발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는 책을 번역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은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김선형과 SF 마니아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장르에 적잖이 애정을 가진 권진아 옮김
책세상,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