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우 형사는 헤어지기 전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떻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에게 빈에 대해 썩 내키지 않는 상당히 주관적인 묘사를 했던 것 같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디에 사느냐는 내 질문에 자기는 도시가 싫다고 대답했다. 도시에는 향수 냄새와 음식 냄새, 세제 냄새, 쾨쾨한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고 그 위를 지독한 똥 냄새가 뒤덮고 있기 때문에 도시가 싫다고 했다.
나는 유럽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울에서 2 주간 머물렀다. 늘 그렇듯이 민주주의를 관장하는 대통령과 장관들은, 모든 것은 통제 하에 있으며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표방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실종된 가족을 여전히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국회의원으로 둔갑한 옛 독재자의 아들을 기필코 피고석에 앉히겠다는 집념에 불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그즈음에는 옛 독재자가 명예 총사령관으로 엄청난 승격까지 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통제 하에 있고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에서는 제도적으로 모두 합법적이기 때문에, 나처럼 불온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치아까지 완전 중무장하고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한 경찰 백여 명이 거리를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 대법원의 갑작스런 결정과 뭔가 관계가 있다고 믿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경찰이 동원'된 다음 날, 대법원은 모든 소송 사건을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단정지었다.
형사의 말이 옳았다. 도시는 온통 똥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할당된 지면에 얽매여 오스트리아 신문에 6일간 연재되었다. 즉, 상업 매체라서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 오늘날 신문 지면은 작품의 사상이나 관심, 작품성에 좌우되지 않는다. 회사 경영진이 신문사를 운영하다 보니 그들이 유일하게 바라보는 척도는 광고나 스포츠, 연예 기사를 얼마나 싣느냐에 달려있다. 오래 지속되는 것을 싣게 되면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B 에디션 출판사 덕분에 이 이야기를 오리지널 버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고 형사를 만난 지도 그새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격동의 나라인 한국에서는 모두 예전과 똑같아지기 위해 모든 것이 변했다.


루이스 세풀베다(2002)도 충분히 납득할 거라고 혼자서 단정짓는 패러디. ㅡㅡㅋ



핫라인 Hot Line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 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2005




이봐요, 입 더러운 아줌마. 멀쩡한 눈을 그렇게 꽉꽉 가려 눌러 놓으면 산소 공급이 되지 않고 압력이 증가해서 정말로 결막이 찢어질 수도 있어요. (물론 뻥) 물론 보통 사람들은 결막이 탄소나노튜브로 되어 있어서 그 정도 실랑이나 드레싱 가지고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저급 개그 안습)

동아딸랑일보도 정말 안습. 신문을 인쇄하는 종이와 잉크가 아깝다.


+ 추가
그 날 국회에 견학갔던 김천의 어떤 고등학생이 이 장면을 캠코더로 찍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는지라 캠코더를 집에 두고 와서 이걸 확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단다. 그런데 경찰은 피해자(누가 피해자야? 더러운 눈에 붙어있는 거즈? ㅋㅋㅋ)의 입장을 고려해 동영상을 공개하진 않을 것이며,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의 캠코더였다면 동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유포됐을텐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
이라고 밝혔단다.


나도 한 번 해 볼까?

사실 제 터치팟은 용량이 5 테라바이트에 도난방지 자폭기능이 들어있지만, 어느 췌장암 환자의 입장을 고려해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 터치팟이 인식하는 미디어 파일 형식이 이진법이었다면 파일이 이미 인터넷에 떠돌텐데 이 제품은 293진법을 이용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네요.

흠. 이게 훨씬 신빙성있어 뵈는데? ㅋㅋㅋ

이승환 t Map

And Everything 2008. 11. 10. 00:52

이승환 : 드림팩토리 공장장, 완벽주의자, 라이브의 횡재, 어린 완자, 축복받은 DNA의 소유자.
음악이 하고 싶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기획사 18군데에서 퇴짜맞았다. 아버지에게 600만원을 빌려 매니지먼트 없이 앨범을 만들었다. 관객 6명을 앞에 두고 공연했다. TV에 출연하지 못하고 라디오와 길보드에서 입소문만으로 성공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데이비드 캠벨을 프로듀서로 두고 앨범을 녹음했다.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하려고 했다. 공연을 통해 팬들과 교감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쟁기념관에서 5시간 반 동안 공연했다. 대중음악과 언더그라운드를 모두 아우르면서도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묘한 위치에 섰다. 자신의 골동품을 자랑하는 대신 피규어를 내놓았다가 중년 오타쿠라는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CD로 정규 앨범을 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계속 새로운 노래를 내놓는다.


오태호 : 작곡가. 메탈에 심취해있던 이 기타리스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승환이 들려준 엘튼 존을 듣고 방향을 180도 바꿔 발라드로 전향하게 된다.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한 사람을 위한 마음", "화려하지 않은 고백" 등 이승환의 초기 히트곡을 쏟아냈으나, 이오공감 이후 이승환이 록으로 점점 방향을 틀면서 둘의 음악 성향이 맞지 않아 합작이 끊긴다. 이승환의 히트곡들은 김광진, 김동률, 정석원, 유희열, 황성제 등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른 것이 많아서 사람들은 이승환이 노래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승환은 한국에서 최초로 스스로 앨범을 제작한 가수이고,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이승철 : 가수. 마약사범. 돈만 내면 표절이 샘플링으로 둔갑한다고 믿는 순진한 바보 혹은 더러운 능구렁이. 이승환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이승철이 첫 대면에서 반말을 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승철도 나중에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은 이승환과 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일 뿐이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나이 한 살 많다고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승환과 이승철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곧잘 착각하곤 하는데, 슬프게도 이승환을 이승철로 부르는 사람은 있어도 이승철을 이승환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박신혜 : 배우. 13살 때 이승환의 ""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데뷔했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아역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원래는 연기자가 아닌 가수로 데뷔하려고 했고, 데뷔 후에도 계속 가수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때때로 이승환의 공연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춤을 보여주곤 한다.
김남주, 김현주, 신민아 등이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스타덤에 오르자 이승환은 아예 직접 배우를 뽑아 뮤직비디오에 출연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신호탄이 "그대가, 그대를..."에 출연한 김정화였다. 이후 한동안 연기자들을 속속 데뷔시켜 연기자들이 벌어들인 돈을 음악에 쏟아붓느라 남은 돈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제는 드림팩토리에 남아 효녀노릇을 하는 것은 박신혜 뿐이다. 이제는 서로를 삼촌, 조카로 부르는 사이가 되었지만 쉽사리 말을 놓지 못하는 이승환은 여전히 박신혜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컨츄리꼬꼬 : 개그맨. 예전에는 개그맨 겸 가수였다. 2007년 크리스마스에 원래 이승환이 대관했던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7년만에 공연했다. 이승환 측은 크리스마스 하루의 대관을 컨츄리꼬꼬 측에 양도하면서 무대 기본 구조를 빌려주기로 했는데, 컨츄리꼬꼬는 이승환의 공연이 끝난지 10시간 뒤 공연을 시작하면서 이승환의 무대를 모두 마음대로 사용했다. 이승환은 노발대발했고, 컨츄리꼬꼬 측은 억울하다며 맞대응, 급기야 이승환은 무대 저작권을 인정하는 첫 사례를 만들겠다며 소송에 나섰고 컨츄리꼬꼬의 맞고소가 이어졌다. 법원은 지난 여름 형사소송에서는 쌍방 무혐의 판결을 내렸고, 민사소송에서는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이승환 측에서는 법원의 보도자료 이외에 별도로 언론에 의견 표명을 하지 말라는 권고사항을 컨츄리꼬꼬 측이 어겼기 때문에, 컨츄리꼬꼬 측은 변호사에게서 이유는 아직 전달받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양측이 모두 이의를 제기해 민사소송은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차은택 : 뮤직비디오/CF 감독. 귀신소동으로 10년동안 가슴앓이하게 만든 "애원"의 뮤직비디오 감독을 맡았고 그 뒤로 이승환과 같이 작업하고 있다. 1999년 Mnet 영상음악대상에서 "에쵸티"를 목이 터져라 외치던 소녀팬들의 당연한 기대를 믹서기로 갈아엎고 "당부"로 대상격인 뮤직비디오 작품상을 수상했다. 뮤직비디오에 맞는 완결된 스토리 라인과 붉은색과 푸른색이 대비되는 뚜렷한 상징, 그리고 드디어 화자의 존재 없이도 작품을 전개할 수 있는 단계에이르러 한국의 뮤직비디오도 하나의 '예술'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한국 뮤직비디오의 방향을 제시했다.

윤하 : 가수. 일본에서 먼저 데뷔해 한국에 역진출했다. 음악 잘하는 젊은 것들한테서 기 빼앗는 것이 특기인 이승환은 눈길가는 신예로 빅뱅과 윤하를 꼽았고, 둘은 모두 이승환의 공연 오프닝 무대에 섰다. 윤하는 토이의 앨범 Thank You에 참여하면서 화제가 되었다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유희열이 백발인 줄 알았다는 둥, 세대 차이가 있다는 둥의 발언을 해 토이 팬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뿜는 힘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력해서, 이승환은 윤하의 대학가요제 축하공연을 보고 자신의 공연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평했다.

케니 아로노프 : 세계적인 드러머. 2007년 환타스틱에서 이승환과 함께 공연했다.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42곡을 연습하고 밴드와 손을 맞춰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공연 후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지금껏 했던 공연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승환은 콘서트를 브랜드화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한국 공연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9년째 이어가는 '차카게 살자' 콘서트는 수익금 전액을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하며, 모든 공연장에서 기부금을 모금한다. 지방의 공연기획자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리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은 아이템이 기상악화로 물거품이 되어도, 이승환의 욕정은 계속된다. 자, 그렇다면!


Who is next?
이승환이 술자리에서 한시간 반동안 '넌 너무 느끼해'라는 말만 퍼부었던 성시경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온갖 저질 질문을 슬기롭게 잘 피해간 주걸륜.



인용
V.I.P - 이승환
누가 이승환을 모함했나


강명석(매거진t 기획위원10아시아 편집장)씨의 문체를 따라해 보려고 했는데 내공이 스케이트장의 얼음 조각에도 못 미치는구나. orz

한국은행, "오만원", 한국조폐공사, 2009
한국은행, "십만원", 한국조폐공사, 2009


논의 대상인 이 두 작품은 2절판으로 된 숫자 총서(editions numerotées)다. 앞면과 뒷면 양면이 인쇄된 이 작품들은 역광에 비춰 보면 섬세하게 공들여 만든 귀중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장인의 작품으로 최고 기술을 뽐내고 있다. 다른 출판업자들이 이런 기술을 가지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고, 그럼에도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고도의 기술이다.
이 작품들은 수집가가 좋아할 만한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복사본이 인쇄되어 나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출판 결정이 수집가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가격은 많은 사람의 주머니 사정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에 넘쳐흐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금값으로만 산정되는(이런 표현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 작품들의 유통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애호가들은 시립도서관의 예에 따라(도서관의 책을 대출하듯이) 그것을 직접 소장하여 감탄의 눈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커다란 희생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작품에 물리적 손상이 가해져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이 손에서 저 손으로(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작품이 훼손되게 된다) 계속 유통되도록 하기 위해 다른 독자들에게 몹시 재빠르게 그것을 넘기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리로 대여하게 되면 그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며, 구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더 한층 노력하고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정가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얼마나 야심만만하게 기획되었는지 강조해 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작품의 내적인 가치로 평가되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작품들의 문체적 가치를 평가해 보자면 이 작품들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대중의 열광이 완전한 속임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혹은 투기를 목적으로 야기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마저 생기게 된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사 구조에 일관성이 없다. "오만원"에서 앞면에 신사임당의 얼굴 정반대쪽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내비치는 무늬의 그림은 '포도를 그린 치마' 혹은 심지어 '오천원 (제5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십만원"의 주요 소재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김구의 사진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혹시 이 황해도 출신 정치가와 어떤 식으로든 혈연관계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경우 우리는 너무나 쉽게 현학적인 알레고리에 빠져들 수 있다. 그건 "백범일지"를 지은 작가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과대평가이다(김구는 독립운동의 아버지이며, 따라서 국가의 아버지라고 운운하는 것은 뉴라이트가 보여주는 아주 위험한 삼단 논법이다). 일관성 없는 서사 구조는 독자에게 혼란만 줄 뿐이며 젊은이들의 취향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그로 인해 적어도 그 젊은이들과 그다지 교양이 풍부하지 않은 계층이 이런 작품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내용의 층위에서 관찰되는 비일관성이 형식적 오염의 측면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주위의 모든 장식은 매일마다 흥분제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본 환상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앙리 미쇼의 그림처럼 환각적이고 몽상적인 모양으로 도배되어 있는 마당에 초상화를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아예 사진을 붙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두 인물의 초상과 뒷면의 풍경은 저급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범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중도 좌파 정책에 대한 양보일까?) 소용돌이, 나선, 물결 모양의 구성을 통해 이 작품은 독자를 환각으로 이끌고 마음의 눈에 거짓된 가치와 사악한 허구의 창조물로 가득찬 우주를 보여주려는 단호한 결단력을 드러낸다. 기하학적 도형을 계속해서 반복함으로서 사상 또는 신의 속성을 그리려는 끈질긴 태도는(매 페이지마다 불교에서 유래한 게 분명한 눈부신 좌우 대칭 구조물이 네다섯 개씩은 등장한다) 무(無)의 형이상학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작품은 순수한 기호 그 자체이다. 이 기호에 우리는 동시대의 시학을 갖다 붙이는데, 이 종이들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 종이를 모아 말라르메의 "책"처럼 잠재적으로 무한한 책을 만들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다 쓸데없는 주장이다.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 기호는 그 자체의 무용성 속에서 소모될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숨어있지 않다 - 우리는 이런 의혹을 품을 수 있다.
이건 소비적인 현대 문화의 예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독자들이 이 작품에 보여 준 호의는 흉조처럼 보인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취향은 폐기의 미학, 즉, 소비의 미학을 감추고 있다. 우리 눈 앞에 나열된 복사본들은 일련 번호를 통해 그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 같지만그건 다 속임수다. 과시적 소비에 대한 요즈음의 미학적 취향이 곧 독자들에게 더 많은 복사본, 다른 견본을 찾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교환하면서 한 개의 견본에서는 얻을 수 없는 보증을 얻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기호의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이 각각의 작품은 현실에서 우리의 관심을  떼어놓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이 작품의 환각적인 전위주의가 아주 뿌리 깊은 소외를 은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의 리얼리즘은 위조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서평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복사본을 세 개씩 보내 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원래는 "작은 일기"에 수록된 '희한한 세 개의 비평' 중에 1967년 처음 발행한 5만리라와 10만리라를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켜 관찰함으로써 물신 숭배 사상이 팽배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꼬집는 글이었다. 우리나라도 내년에 5만원과 10만원 지폐가 발행될 예정이니 지폐의 디자인을 묘사한 부분만 머리를 쥐어짜 바꿔 보았다.

그건 그렇고, 도서관에서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 움베르토 에코의 즐거운 상상 06"이라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제목의 책이 있길래 펼쳐 봤더니, 내용이 "작은 일기"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같은 책을 제목만 바꿔서 낼 수 있지??? 하면서 살펴보니, 그 책은 영어판을 번역해 놓았고 95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작은 일기는 이탈리아어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도 빌려서 두 권을 비교해 보니 아무리 영어 중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나라 이외의 문화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미쿡인들을 위해 움베르토 에코가 세심하게 배려해 인명과 지명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샤샥 바꾼 부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용 자체가 다른 곳이 많은지! 이 글만 하더라도 이현경씨의 번역은 물리적 손상을 막기 위해 돈을 빠른 속도로 유통시키며 고리로 빌려줄 경우 가치가 높아진다고 되어있는데 안수진씨의 영어 중역은 자꾸 써서 닳고 찢어진 돈이 오히려 더 귀중해진다고 쓰고 있다. 누구의 번역이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다. @_@
문체는 안수진씨의 영어 중역이 좀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포 강 유역 평야 사회에서의 산업과 성적 억압(이 책에서는 포 강 유역이 어디인지 모르는 한국 독자를 위해(?) 북부 이탈리아로 번역해 놓았지만)'에서는 밀라노와 파리의 지리를 알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친절하게 그림을 곁들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도와준다. (길 이름만 계속 나열한 이현경씨의 번역덕택에 나는 구글맵스를 계속 들여다 보며 동선을 쫓아가야만 했다) 이 외에도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번역했다는 옮긴이의 변명과 부합하듯이 영어 중역은 역시 학구적 지식이 부족한 한국 독자의 수준에 맞춘 듯 옮긴이의 설명이 좀 더 자주 등장한다.

그래도 책 번역은 원작자의 언어 그대로 번역하는 게 제일 바람직하다. 바우돌리노가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은 왜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 전날의 섬을 번역한 이윤기가 아니라 이현경이라는 모르는 사람이 번역해서 책장이 안 넘어가네 글이 딱딱하네 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는데, 나는 오히려 드디어 이탈리아어를 한국어로 바로 번역한 책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문학 상당수가 일본어 중역이어서 오역은 물론이고 일본어 어휘를 무분별하게 그대로 들여와 한국어가 오염되는 문제가 있었듯이) 아무리 영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다고 해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 자체에서 유실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를 둘러싼 번역 이야기"(공교롭게도 이 책은 일본어 중역이다)에 실린 '번역에서의 누락과 삭제에 관하여'를 보면 장미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생략된 부분이 등장하길래 찾아 봤더니 당연히 한국어판에도 그 부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는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도 프랑스어 중역본이 들어온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조그만 차이가 문화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기 Diario Minimo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이현경 옮김
열린책들, 2004
Milano, Bompiani, 1975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Misreadings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안수진 옮김, 조형준 해설
새물결, 1995/2005
New York, Harcourt Brace & Company, 1993

택시 기사들과 얽힌 모험은 흥미롭기로 뉴욕을 따라올 곳이 없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뉴욕에는 온갖 출신과 언어, 피부 색깔의 택시 기사가 있다. 표찰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그 기사가 터키 사람인지, 말레이시아 사람인지, 그리스 사람인지, 러시아계 유대인인지 알아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라디오와 연결되어 있는데, 방송은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노래를 방송한다. 때로는 빌리지에서 센트럴파크까지 가는 것이 마치 카트만두로 여행하는 듯하다.
두 번째로 뉴욕에서는 평생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직업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 실직한 은행원, 갓 이민 온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택시 기사 자리는 집단으로 계승된다. 어느 시기에는 대다수가 그리스 사람이고, 다음에는 모두 파키스탄 사람, 그 다음에는 모두 푸에르토 리코 사람 등이다. 따라서 이민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고, 또 여러 인종의 성공에 대해 관찰할 수도 있다. 어느 집단이 택시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그들이 성공하고 있으며, 소문이 돌아 모두 담배 가게나 야채 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며,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옮겨 가고 있으며, 그들의 사회적 단계가 상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심리적 차이를 제외하면(히스테릭한 사람, 아주 친절한 사람, 정치적 참여자, 무엇인가에 반대하는 사람 등이 있다), 택시는 최고의 사회학 관측소다.
지난 주 나는 어느 유색인이 모는 택시에 타게 되었는데,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 기사는 자신이 파키스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고(뉴욕에서는 언제나 누군가 다른 곳에서 온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해댔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이해한 바로는,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한국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도 몰랐다(대개 택시 기사에게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쓴다고 말하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제 온 세상이 영어로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한반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가운데에 산들이 있고, 주위에는 해변이 많이 있고, 아름다운 섬이 많이 있다고. 그는 우리 인구가 몇 명이냐고 물었고, 그렇게 적은 숫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우리가 모두 황인인지 아니면 혼혈 인종인지 물었고, 나는 원래 완전히 황인 국가였으나 지금은 외국인이 약간 있지만 어쨌든 미국보다는 적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그는 파키스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어했고, 아마 약간은 있지만 필리핀이나 중국 사람들보다는 적다는 말을 듣고는 실망하는 표정이었고,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를 피하는지 자문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말실수를 했다. 나는 인도인도 조금 있다고 말했고, 그는 증오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토록 상이한 두 국민을 한데 묶어 놓았고, 또 그토록 불쾌하게 열등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우리의 적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미안한데, 뭐라고요? 하고 묻자, 그는 인내심 있게 우리가 영토 회복, 인종적 증오, 끊임없는 국경 침범 등으로 인해 현재 어떤 국민과 전쟁 중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인내심 있게 우리의 역사적 적들, 즉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그런 적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우리는 적이 없다고, 마지막 전쟁은 벌써 55년 전에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그 때는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이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쟁을 했다고. 그는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적이 없는 국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일은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우리의 무감각한 평화주의에 대한 보상의 표시로 팁을 2달러 주고 내렸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에스프리 드 레스칼리에esprit de l'escalier라고 부르는 현상, 즉 누군가와 이야기한 다음 계단을 내려와서야 갑자기 그에게 말했어야 하지만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문장이 떠오르는 현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사실 한국인들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다. 한국인들은 외부의 적이든 뭐든 누가 적인지 설정하는 데 전혀 합의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내부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다. 예전에는 도시 대 도시, 주류 학파와 비주류 학파, 다음에는 계급 대 계급, 정당 대 정당, 정당의 한 파벌 대 같은 정당의 다른 파벌, 그 다음에는 지방 대 지방, 마지막으로 정부 대 경제권력, 신문 대 신문, 개신교 대 다른 종교, 보수 대 진보의 전쟁이다.
그랬다면 혹시 그 택시 기사는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적이 없는 나라에 속해 있다는 보기 흉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1996)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제 2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



피터의 법칙

And Everything 2008. 8. 28. 15:58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데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그 누구도 이제는 자기 직업을 수행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자기 직업을 잘 수행할 때 놀라기도 한다. 군복을 입은 깡패들이 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시민들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경찰관이 깡패에게 맞은 시민이 아니라 군복을 입은 사람을 붙잡을 때 경찰의 전문성을 칭찬하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로 전 세계에는 자기가 직업으로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은 널리 알려진 피터의 법칙 때문이다. 피터의 법칙은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렌스 피터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대기업 또는 특히 공공기업에서 피고용인이 무능력의 수준까지 승진하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즉 특정 분야의 일을 잘 해내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게 되고 다른 분야까지 담당하게 됨으로써, 직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능률과 효율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무능력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츠키야마는 훌륭한 포크레인 운전수인데 인사 책임자로 승진하게 되면, 땅을 파는데는 아주 유능한 츠키야마가 조직 관리에는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터의 법칙이 말하듯이, 회사 조직에서는 규정상 각자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종 한국의 대통령은 선거 운동 조직에서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물을 공공기업의 이사나 금융회사의 회장으로 임명하기도 하며, 따라서 많은 공공기업 이사들이 통상적인 업무를 잘 모르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릇된 전문성 의식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부정부패의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즉 누군가에게 혜택을 주거나 또는 제거하기 위해 그가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도록(돈도 더 많이 주면서) 자리를 옮기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파산 신청자에게 증권 시장 관리를 맡겼고, 청와대의 어느 고위 경제 관리가 해임되었을 때 그에게 OECD 대사를 맡기기도 했다.
국제적 버전의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자기 능력 밖의 일을 수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도 무능력하다고 증명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허락한 것을 가리킨다.



움베르토 에코(1993)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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