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어스트 에버스'에 해당하는 궁시렁 2

  1. 2009.04.05 묻는 사람이 없어 나는 답할 수 없다 4
  2. 2009.04.05 우유 15
호어스트 에버스의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로 촉촉히 젖어있는 책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가 출판사를 바꿔 작년에 새로 출간된 걸 모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예전에 책을 샀기 때문에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 책 본문을 미리 보여주는 아마존을 따라하는 네이버 책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니 -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가 없다!!! 쿠쿵!!! 그냥 에필로그 1, 2로 바뀌어 버렸다!!! 쿠구궁!!!
아놔, 세상에, 이럴 수가, 기타 등등 경악에 해당하는 많은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으며 책을 살펴보니 그냥 출판사만 바뀐 게 아니라 번역도 다시 손질한 거였다. 여러 군데 살펴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네.

My Life as a Search Machine

그리고 호어스트 에버스의 새 책이 나왔다. 아마도 1년 반 쯤 뒤에 김혜은씨의 번역으로 작가정신에서 '검색기 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듯 하다.

우유

Life 2009. 4. 5. 01:27
방금 우유에 네스퀵을 타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성공적으로 학업을 중도에 접고 베를린의 여러 소극장 무대에 올라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는 호어스트 에버스의 작품집 중에 금요일에는 별로 읽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책의 끝부분에 있는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라는 멋진 문구를 주제로 궁시렁을 써야 겠다고 얼마나 오래 전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건 며칠 전에 잠이 들기 직전 생각했던 것을 키보드에 옮길 때가 된 것이다.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 이 아니 궁시렁과 일맥상통하지 않을소냐! (여기서 -소냐!를 가지고 스테이크를 만들기 위해 자살하는 소 따위를 가져다 씨알도 안 먹히는 더글러스 애덤스식 개그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함)

그래서 다시 우유로 돌아가면, 먼저, 방금 냉장고에는 1리터들이 우유 두 병이 있었는데, 한 병의 양이 미묘하게 적어서, 나는 할머니가 우유를 먹다가 모자라서 새 우유를 뜯어 병아리 눈물만큼 컵에 더 부었을 거라는 기막히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유를 먹으려고 유통기한이 좀 덜 남은 병, 그러니까 미묘하게 양이 적은 그 병의 뚜껑을 돌렸는데, 새 거였다. 두 병 다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1리터짜리 멀쩡한 우유였다! 똑같은 제품인데 양이 다르다니! 그런데 방금 이 내용을 쓰다보니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오늘, 그러니까 4월 4일까지인 우유가 아주 조금 남아있다는 게 기억났다. 누군가는 우유룰 한 컵 따른 뒤 병에 한 모금 정도 남는다면 그걸 그냥 단숨에 벌컥 마셔버리고 빈 병을 분리수거용 바구니에 던져넣을지도 모르지만, 남은 건 내일 마실 때 먼저 부으면 되니까 나는 당연히 한 줌도 안 되는 걸 냉장고에 도로 넣었던 건데, 방금 우유를 마실 때 새 병을 따기 전에 그걸 먼저 부었어야 했다-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는 FIFO를 성실히 이행해야 하니까.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가 자주 저지르는 부류의 어리석은 일 때문에 괜히 양이 더 길어졌는데, 다시 우유로 돌아가면, 부엌에 불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컵에 우유를 따랐기 때문에 컵에 우유를 아주 조금 더 많이 부어버려서 한 모금 마셨다. 바로 여기서 아이디어가 생각난 것이다. 나는 극히 최근까지 보통 흰 우유는 먹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흰 우유를 안 먹는다고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답하기로 한 것이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한국에는 제 무덤 제가 판다는 속담이 있다) 당연한 수순으로 왜?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내가 워낙 입이 짧으니 마땅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 궁시렁을 읽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입이 짧은 걸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굉장히 타당한 가정을 세우고 계속 진행하자면, 음- 딱히 마땅한 이유는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 저 먼 어린 시절 흰 우유의 맛에 화들짝 놀란 뇌와 혀가 혼연일치로 그 액체를 거부라고 위에게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물론 지금은 초딩이라고 하는데, 내가 졸업한 뒤에 바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면서 일재의 잔재를 하나 더 털어냈기 때문에 내 또래중에는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과거를 회상하면서 국민학교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걸 보면 가끔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국민학교라고 써봤음) 1학년 때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했는데, 나는 흰 우유를 먹지 않는데도 단순히 선생님이 우유 급식 신청서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한동안 먹지도 않는 우유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혹시 엄마가 흰 우유를 먹여보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신청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먹지도 않는 우유를 내 돈 내고(물론 공짜가 아니라는 의미만을 가짐) 받아서 야, 이거 너 먹어-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다. 흰 우유 대신 초코우유가 배달되던 날만 빼고.

사실 마일로와 네스퀵은 네슬레가의 형제임. ㅎ

흰 우유를 먹지 않으니까 엄마는 우유에 초컬릿 맛이 나는 가루를 섞어서 먹여보겠다는 멋진 시도를 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마일로라고, 그냥 가루만 먹어도 맛있는데 몸에 유익한 여러 성분까지 보너스로 들어있어서 아이들은 초코우유를 먹어서 좋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성공적으로 우유를 먹일 수 있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애들 좋고 부모 좋고 하는 제품이 있었다. 얄밉게도 아무 거나 주는 대로 안 먹고 버티는 궁시렁과 아무 거나 주는 대로 닥치고 잘 먹는 궁시렁의 동생 역시 우유에 마일로를 타서 주니 좋다고 먹었는데, 문제는 이 가루가 찬 우유에는 잘 안 녹는아서 바텐더마냥 우유와 마일로를 넣은 거대한(그래봤자 300 mL? ㅋ) 용기를 신나게 흔들어야 겨유 섞일락말락하는 점이었다. 위아래로 용기를 흔들다 뚜껑이 날아가면서 아직 초코우유로 변신하지 못한 불완전 상태의 혼합물이 마구 어지러진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골치를 단박에 해결해 준 영광스러운 제품이 바로 네스퀵이다.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겠지만 네스퀵은 이 궁시렁의 맨 첫 줄에 버젓이 등장한다) 마일로보다 맛은 덜하지만 어쨌거나 초컬릿 맛이 나고 휘휘 젓기만 하면 찬 우유에도 문제없이 녹아드는 이 신비한 가루(네스 아닌가!)를 나는 만 26세 4개월이 되도록 끊지 못하고 지금도 나는 유치원생마냥 우유를 먹을 때 꼭 네스퀵을 타서 먹는다. 물론 어엿한(얼씨구?) 성인이므로 흰 우유도 조금씩 먹을 수는 있는데, 이게 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목장의 신선함이 살아있는 서울우유가 아닌 경우에도 가능한지는 아직 실험해보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 아주 쵸-큼 고소한 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한다.
 
아놔...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와 제 무덤 제가 판다는 이렇게 어울리는 한 쌍인 것을! ㅋㅋㅋ (불길함;;;)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 얘기도 내친김에 해보면, 어렸을 땐 단 것 좋아하는 꼬마들이 대개 그렇듯 콘푸레이크를 거부하고 호랑이 기운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콘푸로스트를 먹었다. (물론 나에게는 고양이 기운만큼도 솟아나지 않았다) 콘푸로스트의 설탕 덩어리가 녹으면 달착지근하다고 아무 소리 않고 흰 우유를 먹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따가운 눈총) 조금씩 자라면서 고소한 아몬드 플레이크를 먹는 과도기를 거쳐,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지나치게 단 게 싫어진 뒤로는 현미나 오곡 플레이크를 먹는다. 켈로그는 웰빙 유행에 맞춰 곡물이야기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밀고 있다. 이번에 신제품도 나왔던데- 그걸 사 볼 걸 그랬나... ㅋ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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