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출근 마지막 날이었다.

17일부터 성대로 출근하게 되어서 16일까지만 나온다고 한 달 전부터 전썖한테 미리 얘기했지만 내 뒤에 올 알바를 구하지 못해(몇 명 지원은 했는데 다들 함량미달) 나만 똥줄타게 알바 못 구할까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 지원자(행과임! ㅋㅋ)가 다음 주에나 서울로 올라온다기에 일단 ㄴㄴ한테 인수인계를 한 뒤 다시 ㄴㄴ이 새로 올 사람에게 업무를 넘겨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애초에 업무 매뉴얼을 만들려고 작년 말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당장 급하지 않은 모든 일이 그렇듯 실행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리다 결국 아악-마감이-코앞이야 급의 파괴력을 갖추고서야) 옆에서 손가락으로 이건 여기 그건 저기 콕콕 집어주지 않아도 척척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혼자서도-잘해요-친절한-그림-매뉴얼을 만들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공들여 적었어도 분명히 뭔가 빼먹은 게 있을 거다. ㅡㅡㅋ
하여튼 퇴근 1분 전까지 또 쓸 게 뭐가 있을까, 더 자세히 묘사(아놔... 이건 그냥 업무 매뉴얼일 뿐인데 orz)해야하지 않을까, 그림 배치를 어떻게 할까, 업무 분류를 좀 더 직관적으로 해야하나 등등 나는 이제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내일 이후의 삶을 깔끔하고 명랑하게 이어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고민을 했다. 게다가 오늘따라 하필이면 업무 인수인계에 필요한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 짠 것처럼 빵빵 터지는지, 주소 변경이며 승진 축전이며 평소엔 없던 와인 주문에다 주소가 빈 칸으로 나온 영수증까지;;; 또 우편물은 왜 이렇게 많은지 처장님이 메릴랜드로 보내는 달력에 박과장님이 보내라는 쌀 두 박스(서류까지 세 덩어린데 이걸 큰 상자 하나에 담는 게 우편요금, 배달, 수령 등 많은 측면에서 유리한데도 이미 단아하게 포장된 쌀 두 상자를 하나로 합칠만한 큰 상자를 사서 다시 포장하기 너무 귀찮아서-_-ㅋ 그냥 둘이서 무거운 상자를 낑낑 들고, 기부식 앨범은 기부자가 언론보도를 원하지 않아 기사 스크랩을 할 게 없어서 기사 스크랩을 담은 바인더 크기에 맞는 커다란 박스에 앨범 하나만 달랑 넣으려니 너무 빈 공간이 안쓰러워 보여서 한 치수 작은 상자에 보내느라...

- 한 줄로 요약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 마지막 날인데 무지하게 바빴습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처장님은 알바들을 모두 모아서 점심을 사주셨는데, 말로는 다른 직원들도 같이 먹고 싶었을 거라고 했지만 오늘 점심의 가중치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중계방송에 온통 쏠려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처장님 그런 걸 굳이 두 번이나 강조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헐헐헐 하면서 하긴 뭐 원래 우리 사무실이 평소에 알바를 지극정성으로 챙겨주고 그런 건 거의 없는 부서니까 하면서 그래도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열과 성을 다해서(꼭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임) 일했는데 좀 섭섭하네 하면서 그냥 넘어가고-
졸업식을 빼면 사실상 학교에 오는 게 오늘이 마지막인데, 명목&실질적으로 9년 동안 몸 담은 학교가 오늘로 마지막인데, 지금까지와는 거의 모든 것이 다르고 완전하게 성공적으로 낯선 환경에 풍덩 접어들기보댜는 그냥 이 알바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녹지 않은 눈덩이처럼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는데, 이런 처량한 감정에 축축하게 젖을 새도 없이 휘릭휘릭 일하다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혜지는 자기 후임도 내일 모레면 결정될테니 그때까지만 나올 거라며 휙 가버렸고, 매뉴얼을 더 쓰려다 에이씨 몰라- 하면서 출력하고 막상 컴퓨터를 끄고 직원분들께 인사를 하려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감사합니다-만 되뇌이고 말았다. 그동안 여기서 일하면서 얼마나 즐거웠는데. 다른 곳으로 안 가고 계속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 잘 대해 주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냥 그렇게 그렁그렁 악수만 휘리릭 하고 끝나버렸다.


- 졸업식 날 인사하러 또 올 거잖아요.
- 그래요. 부장님 말씀이 맞는데.


허탈한 마음으로 정대로 가서 사물함을 비웠다. 3년 동안(마지막 1년은 그냥 안에 든 책을 비우지 않았을 뿐) 썼던 사물함에서 이제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거대하고 무거운 구식 랩탑을 담고, 어차피 모두 개정되어 더 이상 쓸 수도 없는데 왜 아직까지 움켜쥐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여러 책을 버리고, 그래도 예전에 공부하던 건데- 하면서 몇 권은 담고, 이렇게 간단히 사물함을 비우고 보증금을 받으니 진짜 다 끝났다.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 정말 이제- 떠나야 해? 안녕인 거야?
내일이면 낯선 학교, 낯선 환경, 낯선 전공, 낯선 공부, 낯선 사람, 낯선 시설, 낯선 시스템, 낯선 모든 것을 헤쳐 나가는 거야?



우리 학교는 이제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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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내 심장속의 뱀 2010.02.17 06:01      

    이 글과 글의 포스팅 시간을 보니 마음이 좀 그러셨겠구나...
    짐작이 갑니다. 토닥~토닥!

    자, 이제 음력으로도 새해가 된 마당이니 새 술은 새 푸대에!
    첫 출근 좋은 인상 주시구요, 앞으로 힘찬 날 되세요. ^^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32      

      응원 감사합니다. ㅠㅠ
      교수님들의 이쁨(!?)을 받아야 할텐데요... ㅎㅎ

  2. BlogIcon 청초 2010.02.17 11:59      

    그거슨 바로 같은 학교 같은 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다 졸업과 함께 모두들 다른 학교로 배속 되는것과 같은 느낌...일듯

    아쉬운 감정 훌훌 털고 새출발 잘 하시길 빌겠습니다...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33      

      그거랑은 비교가 안 되는 거임.
      놓고있던 공부줄을 다시 잡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네요. ~_~

  3. BlogIcon 띠용 2010.02.17 20:36      

    기분이 참 묘하시겠어요...;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34      

      그런데 현실은... 이먼ㅇ먼히ㅏㅁ너이ㅏㅂㅈ햐ㅠㅇ미;ㅏㅁ
      (왜 이런지는 며칠 후에 ㅋ)

  4. BlogIcon 마가진 2010.02.18 00:21      

    늘 보아오던 모든 것과 갑자기 헤어진다는 마음은 항상 "허" 하지요.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36      

      새로운 것으로 허한 마음을 메꿔야겠지요?
      아직 본궤도에 들어가지 않아 순조로운 가짜 느낌을 받고 있답니다.
      장어 먹을 때는 이야기가 한웅큼 나올 거에요. ㅋ_ㅋ

  5. BlogIcon cANDor 2010.02.18 03:00      

    이 글 쓰시면서도 왠지 훌쩍훌쩍 하셨을 것 같은데...
    100세주 젤리 2개,, 성대로 보내드릴까요? :D

    잘은 모르지만, 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항상 울거든요..
    그렁그렁.. 뚜욱뚝.. 집에 와선 한동안 멍때리고 앉아있고..
    궁시렁을 기대하며 읽다가,, 마지막쯤 멈칫 생각했어요..
    '이러다 나 울 기세...' ㅡㅅㅡㅋ

    인복은 어딜가나~
    그 낯선 곳에서도 예전처럼 좋은 분들 만나실거에요.
    힘내삼요! =)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42      

      캔더님은 저 야심한 시각까지 안 자고 뭐하셨어요 ㅎ
      기대하신 궁시렁이 아마 조만간 올라올... 흠흠흠. 결코 바람직한 궁시렁이 아닌데...
      좋게 좋게 생각해야죠 orz 빠싱- 힘내겠삼!!

  6. BlogIcon mahabanya 2010.02.19 14:10      

    문과쪽 대학원 생활은 어떨지 심히 궁금하옵니다. 종종 대학원 생활 이야기 전해주세욤~

    • BlogIcon 궁시렁 2010.02.20 00:51      

      처장님 : 진우군, 지도교수님은 정해졌나?
      알바생 : 대략 지도교수는 커녕 오리엔테이션도 아직 안 했다는 내용을 버버버하며 전달
      처장님 : 그래? 우린 입학하기 전부터 연구실에 나와서 이러쿵저러쿵~
      알바생 : 그러게요.

      지난 주에 이랬는데, 막상 가서 보니-
      교수님은 딱 방 한 칸만한 자기 연구실에 혼자(?) 계시고, 시중, 아니 수발, 아니 뭐 어쨌건 '자기가 데리고 있는' 개념의 대학원생이 있는 게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손님 접대를 과사 조교가 oTL)
      지도교수도 1년 지나고 논문 쓰기 시작할 즈음에 정해지고. 원생 여러명이 달라붙은 연구실 중심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닌가봐요. 제 동기 중에 자대 학부생이 단 1명이라니 말 다했죠 ㄷㄷㄷ

  7. BlogIcon 2010.02.20 12:10      

    전 어서 빨리.. 제발 좀 낯선 환경을 접해야.. 이런 생각만 드는데.. 아무튼 파이팅이에요. 뭔 일이건 기합이 중요하죠!

    • BlogIcon 궁시렁 2010.02.21 22:48      

      입조심, 행동조심, 스트레스조심(ㅇㅇ?)
      공부는 언제 할 건지 대책이 없어요. -_-ㅋ

  8. BlogIcon 감은빛 2010.02.22 12:33      

    아, 대학원으로 진학하시는 군요! 축하드립니다!
    성대라면 현재 제 일터랑 무척 가까운 곳에 있네요.
    궁시렁님이라면 새로운 곳에서도 멋지게 잘 적응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힘내세요! ^^

    • BlogIcon 궁시렁 2010.02.26 01:28      

      감사합니다. 너무 잘 적응해서 정신줄 놓고 푸헬헬헬 이러다 미운털 박히는 건 아닐까요. ㅋ
      언제 한 번 북한산 자락에서 저녁이라도? ㅇ_ㅇ

    • BlogIcon 감은빛 2010.02.26 11:20      

      아, 저녁 좋지요.
      꽃 피는 3월에 날을 한번 잡아볼까요? ^^

  9. BlogIcon 리쥬 2010.03.01 08:21      

    오잉 같은 학교....신가봐요 저와..
    (저는 물론 졸업을 애저녁에...)

    • BlogIcon 궁시렁 2010.03.02 15:39      

      은행나무대학교 나오셨나봐요 ㅎ_ㅎ
      전 이제 다니려니까... 빨리 적응하는 것 같으면서도 야-ㄱ간 아리송합니다. 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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