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의사소통은 가능했고 내 영어 실력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곧 그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학 내부나 주변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의 영어 실력은 들어주기 힘든 수준이지만 그것이 당신의 지적 수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화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은 문화 차이와 언어장벽 때문이죠'라고 해석해 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바깥세상은 인정사정없는 곳이었다. 뉴욕에서는 영어 구사가 충분히 안 되는 사람은 불법이민자나 난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나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나이 어린 여자애한테서까지 경멸의 눈초리를 느껴야 했다. 그 점원은 쇼핑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내게, 물건을 꺼내(take them out) 계산대 위에 올려 놓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뒤에서 어리벙벙한 채 서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한 여성이 안됐다는 태도로 나 대신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주었다. 나는 기가 죽은 채로 슈퍼마켓을 뒤로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단, 이는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한참 뒤의 일이다.
큰 규모의 국제학회가 개최되었는데 수많은 분과회의가 열렸고 전 세계에서 많은 과학자가 모여들었다. 물론 비영어권에서 온 참가자도 많았다. 첫날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학회 개최를 알리는 선언을 하는데, 그때는 그 분야의 일인자가 기조강연을 하는 것이 관례다. 그 역할을 담당한 이는 스위스의 중진학자였다. 그는 위엄 넘치는 육중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단상에 올라 연단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과학에 관한 세계 공용어는 당연히 영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는 독일계 스위스인인데, 그의 영어는 독일어 악센트가 상당히 심해서 인사치레로라도 '영어가 유창하시네요'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그의 다음 말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독일이 과거에 모든 과학 분야를 선도한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 와서 설마.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세계 공용어는 바로... 서툰 영어입니다. 이번 회의 기간 중에는 부디 여러분 모두가 자발적으로 회의에 참가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장에서는 커다란 웃음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기조강연에 용기를 얻어서일까, 당시 학회의 각 분과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비영어권 학자들의 활발한 발언이 돋보였다.pp. 16-18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2009
-
-
궁시렁 2010.01.29 15:36
어법에 맞지 않아도 일단 입 밖으로 지르고 보라! 는 말도 있는데,
그렇게 또 막 되는 대로 말하다 보면 어익후,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아악 창피해- 이런 순간이 오더라고요.
저는 brought 대신 bringed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0.48초 뒤에 헉 하고 기도가 막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커피 ~_~
-
-
-
궁시렁 2010.01.29 15:37
아직 재미있는 부분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어요.
가방에 책을 넣고 읽어야 하는데, 그냥 넣고만 다니네요 ㅋㄷ
장어 먹기 전까지는 꼭 완독하겠슴돠.
-
-
-
Kimhojung43200115 2010.01.29 20:22
Me no speaking English very well. 부대 처음 갔을 때 남미 출신 일병놈이 처음 건넨 말이죠...
어.. 어쩌라고;;;?!
-
엘군 2010.01.29 14:25
사실, 영어 교육에 대한 비판이나 경멸의 눈초리도 많지만,
아직 절대 무시할 수 없는게 영어의 세계적인 보편성이죠...
저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
-
매치어 2010.01.29 19:34
저는 과학의 표준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할 때는 서툰 영어가 표준어일지 몰라도- 논문들을 보건데 쓰는 영어는 결코 저급이 아닌 것 같습니다. TT -
-
-
-
내 심장속의 뱀 2010.02.01 17:30
이야~ 말풍선 멋진걸요. 뽀인뜨가 됩니다. ^^
예전에 시드니나 런던에 놀러 갔을때, 물 좀 달랬는데 못알아 듣더군요.
그때 저는 얘들이 제가 혼자 다니는 동양여자라 무시하는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지요. 좀 충격이었다능.
지금은.. 별로 자주 쓸 일은 없지만 영어를 써야 하면 그냥 한국식 서툰 영어를 구사한답니다. ㅎㅎㅎ-
궁시렁 2010.02.02 23:40
원래는 대화의 주고받는 구조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텍스트 형식이었는데, 갑자기 아이폰 문자 도식화가 생각나서 따라해 봤어요.
혹시 워-러ㄹ 라고 하셨나요? ㅎ_ㅎ 런던에서는 꼬였던 혀도 풀리더군요. (어디서 보고 들은 게 있다고 주워들은 섬나라 억양을 성공적으로 덧입혔어요 ㄲ_ㄲ)
남반구 사투리는 훨씬 심하다고 듣기는 했어요. 이런 굳따이같으니라고. ㅋ
-
-
cANDor 2010.02.02 03:03
관블 알리미에는 이글이 왜,,,,
from 삶, 우주, 그리고 대체로 무해한 모든 것 by 궁시렁 2010/01/30 13:42
from 삶, 우주, 그리고 대체로 무해한 모든 것 by 궁시렁 2010/01/30 13:40
일케 두번 뜨는 것일까효...?
오억만배 공감하나,
틀린 말 내뱉은 후 발꼬락부터 머리카락끝까지 오글오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능;; ㅋ-
궁시렁 2010.02.02 11:55
응? 1시 40분 버전은 안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구글 코리아 뭐하나요? (메바님 or 루나모스 님 외 기타 등등 소환댓글 ㅋ)
아악 오글오글 ~_~
혼자서 막 창피해하고 부끄부끄 ㅋㅋㅋ
-
-
mahabanya 2010.02.02 19:39
근데 저 서툰영어가 세계 공용어라는 말은(적어도 과학/공학 분야에 있어서) 진실임.
이런 우스개가 있지요.
국제회의에서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하면 USA 토박이만 대화에 끼지 못한다고-_-;;;
인도, 중국, 일본, 한국, 유럽, 기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적당히 알아듣고 적당히 말하는데 USA는 되게 힘들어하고 말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 반응이 굉장히 뚱하죠. (이 국제회의는 '미쿡' 이외의 지역에서만 유효하긴 합니다 ㅋㅋㅋ) -
-
그별 2010.02.07 16:11
은근히 "세계공통어는 한글이어야 하오"라는 말을 기대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반전의 말 한마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주 좋은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_ _)
앗`... 근데, 지금 미국에 계신건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