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는 가족이 살해되고 고향의 공동체를 파괴당한 유대인, 그것도 아우슈비츠의 지옥을 함께 살아 나온 그의 동료들에게 이스라엘은 매우 소중한 피난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비를 포함한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에도 심한 균열이 생기는 때가 왔다. 1982년 6월에 이스라엘군이 PLO의 군사 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자신이 바라는 유대 민족의 피난처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군사적 방향으로, 미숙한 방식의 파시즘적 방향으로 바뀌어 공격적인 의미에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레비는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밖의 존재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국가가 그 이웃에 취하는 태도는 그의 양심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곤란에 빠졌을 때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레비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 몇몇에게서 "그동안 유대인이 흘린 피에 눈을 감고 있다"는 '비수를 꽃는 듯한' 편지를 받기도 했다.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pp. 258-261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1 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만 한다.
Primo Levi, La Republica, 24 SEP 1982,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구역에서의 대학살2 에 관한 잠파올로 판사와의 대담 중에서 발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プリ-モ ·レ-ヴィへの旅
서경식 지음 / 박광현 옮김
창비, 2006
주기율표 Il sistema periodico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돌베게, 2007
(책에는 없는 궁시렁의 주석)
- 1977년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고, 이집트와의 평화 교섭으로 1978년 사다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82년 레바논을 침공했고 이스라엘군이 관할하던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어진 학살을 묵인하고 방치한 일로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Nazisrael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본문으로]
- PLO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9월 15일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를 점령한 다음날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친이스라엘파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했다. PLO의 발표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3200명 이상에 이른다. 이스라엘 정부가 파견한 진상 조사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의 간접적 책임이 있다. 위원회는 샤론의 공직 진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결론냈지만 샤론은 약 20년 뒤 총리가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