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연다면

And Everything 2008. 11. 26. 16:44

한순간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이 놀랍고 특이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고 어리석음이 이성과 화해하는 이 상황을, 하느님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으며 현대 과학이 누군가의 말처럼 바보에 불과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질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가 마음을 연다면, 그전에 그가 했던 모든 이상한 행동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격적이거나 무례하거나 불성실한 행돌들까지,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가장 기초적인 상식에도 어긋나는 행동까지, 말하자면 그가 했던 거의 모든 행동이, 설명될 것이다. 그가 마음을 열고 나면 조화가 회복되고, 모든 실수가 무조건 완전히 용서될 것이다. (중략) 호의에서 우러나온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의 생각은 떠오를 때만큼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물을 엎지른 뒤에 울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은 이미 수천 번도 더 했다, 그런 경우 문제는 물항아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는 점이다.

주제 사라마구, "도플갱어", pp. 230-231




도플갱어 O Homem Duplicado
주제 사라마구 지음 / 김승욱이 한국어로 옮긴 것을, 마가렛 훌 코스타가 영어로 옮긴 것을 참고로, 궁시렁이 수정함
해냄출판사, 2006


아버지를 만나려면 묘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인생이라는 년이 원래 그런 것이다. 인생은 항상 우리를 버린다. 이 천박한 표현은 저절로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원래 상스러운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아주 드물지만 그런 말을 쓰는 경우 그 자신이 어색해서 깜짝 놀라곤 한다. 소리를 내는 기관들, 즉 성대, 구개, 혀, 치아, 입술에 전혀 확신이 깃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마치 이것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언어를 발음하는 것 같다.

주제 사라마구, "도플갱어", p. 20


내 언어중추도 이렇게 오염되고 있다. 나도 (대략 13년째) 원래 상스러운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아주 드물지만 그런 말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경우 내 자신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하물며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여기서 '전혀'라는 부사는 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쓰인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상스러운 말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과거와 비교해) 상당히 늘어나서, 겉으로 티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당혹스럽다. 예전에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상스러운 말이 나오면, 물론 이런 일은 정말 드물지만, 어쨌건 그런 말이 튀어나오면, 어이쿠, 이런 되먹지 못한 더러운 말이 떠오르다니, 하면서 마치 여러 사람 앞에서 그 말을 내뱉기라도 한 것 마냥 마구 부끄러워했는데, 근래에는 뻔뻔스럽게도 능글맞게 스리슬쩍 그런 말이 떠오르고, 대뇌피질이 화끈거리며 되먹지 못한 어휘 선택을 자책하기는 커녕, 그저 언어중추가 오염되고 있어, 라는 글이나 끄적이지 뭐, 어떡하나, 이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론 대뇌피질에 어깨가 있어서 자신의 어깨를 으쓱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실제 내 어깨가 으쓱하도록 화학신호를 보낸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건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의 때를 묻어 더러워지는 것처럼 내 언어중추도 그렇게 오염되고 있다. OTL



도플갱어 O homem duplicado
주제 사라마구 지음 / 김승욱 옮김
해냄출판사, 2006






+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가 "상스러운" 말인가요?
- "젠장"을 넘어서면 상스러운 말로 분류합니다.

오지라퍼

And Everything 2008. 11. 18. 15:40
제가 하다 만 이야기와 선생님이 메운 그 뒷구절로 작가 분들의 화를 돋워 보세요. 그러면 작가 분들이 아펠레스(알렉산드로스의 궁정화가)와 구두장이의 그 유명한 일화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구두장이는 그림 속 인물이 신고 있는 샌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는 화가가 그 잘못을 바로잡은 것을 확인한 뒤 무릎의 해부학적 표현에까지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아펠레스는 구두장이의 무례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구두장이에게 구두나 잘 만들라고 했지, 역사적으로 유명한 말이잖나. 뒷담에서 자기 집을 엿보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경우에는 아펠레스가 옳았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해부학 전문가가 나서서 그림을 조사해 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입니다. 자넨 정말로 회의자구먼. 작가 분들은 모두 아펠레스입니다, 하지만 구두장이처럼 나서고 싶다는 유혹은 인간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흔한 일이죠.

주제 사라마구, "리스보아 쟁탈전", p. 12


쉼표와 마침표에 온 신경을 쏟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중간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라마구의 문체를 고려해 색깔을 달리해 표시했다.


리스본 쟁탈전 Historia do cerco de Lisboa
주제 사라마구 지음 / 조반니 폰티에로가 영어로 옮긴 것을 김승욱이 한국어로 옮김
해냄, 2007


인간의 습성

And Everything 2008. 11. 12. 14:53
인간은 삶이 모순 덩어리라 할지라도 그 종말을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습성이 있다.

주제 사라마구, "모든 이름들", p.95


모든 이름들 Todos os Nomes
주제 사라마구 지음 / 송필환 옮김
문학세계사, 1999




엘리 비젤의 "밤"을 번역한 김하락씨는 '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 겸 국어단체연합 국어상담소 상담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람이, 책 제목은 (친절하게도 자신이 옮긴 책의 제목 그대로, 하지만 사실 그 책은 프랑스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거지만) "나이트"라고 했을 뿐더러(나이트클럽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개신교도인지, 뒷표지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올바르게 번역한 원고를 출판사에서 마음대로 바꿔버린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훌륭한 번역가들이 옮긴 책만 읽어서인지, 올바른 한국어가 아닌 이런 어처구니 없는 가당치도 않은 표현이 책 표지에 떡하니 있는 것에 짜증이 나서 읽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제3제국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퇴각하는 죽음의 행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수없이 쏟아지는 '하나님' 때문에 책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이지 굴뚝같았다.
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숫자에 님을 붙인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글의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라는 조합은 유일신을 나타내는 상징성이 있고, 어차피 언어는 많은 사람들이 쓰는 쪽으로 계속 바뀌는 거라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기 때문에('하느님'을 사용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사용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구체적 숫자까지 들먹임) 하나님을 표준어로 하면 좋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부드러운 제안처럼 써 놨지만 사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들이 무조건 옳은 줄 아는 (대다수) 한국 개신교의 천박한 무식함, 후안무치, 오만방자함이 철철 넘쳐흐른다. 일요일엔 교회에 가야 되니까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은 일요일에 봐서는 안 된다고 입법을 제안한 어느 정신 나간 국회의원도 있었지?

옮긴이의 글에 단골로 등장하는 난 열심히 번역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두 자기 탓이라는 문구가 이 책에도 있다. '나름대로 충실히 번역한다고 했으나 저자와 독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차마 글로 옮기기에 부족한 절멸수용소의 처참한 모습을 풀어놓은 이 책을 단 한 단어를 잘못 써서 어느 독자에게 누를 끼쳤으니, 의구심은 없어지지 않겠네. -_-;


모든 대륙에서 인권이 침해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도처에서 벌어지는 불의나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들의 처지에 아픔을 느낍니다만, 그들이 폭력적 방법에 호소할 때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폭력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테러리즘은 가장 위험한 답입니다. 그들은 낙담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해합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합니다. 난민들과 그들이 겪는 불행, 아이들과 그들이 겪는 공포, 쫓겨난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절망. 그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 민족은 둘 다 자식을 너무 많이 잃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반목과 유혈 사태는 중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협력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믿습니다. 유대 민족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기회를 줍시다. 이스라엘의 지평선에서 증오와 위험이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스러운 땅과 그 주변 나라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제가 이스라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차례 전쟁에서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한다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민족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가 창조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엘리 비젤의 1986년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문의 일부분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하나님'에 넌덜머리가 나있어서 그런지, 놀랍게도 관용과 평화보다 선민의식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게다가 비젤의 그 굳은 믿음은 슬프게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내가 좀 흥분해서 그렇지, '하나님'만 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하지만 난 (프랑스어를 모르니까) 영어로 된 책을 보겠다. ㅡㅡ;



Night
Elie Wiesel (tr. Marion Wiesel)
New York: Farrar, Straus & Giroux, 2006


레비는 가족이 살해되고 고향의 공동체를 파괴당한 유대인, 그것도 아우슈비츠의 지옥을 함께 살아 나온 그의 동료들에게 이스라엘은 매우 소중한 피난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비를 포함한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에도 심한 균열이 생기는 때가 왔다. 1982년 6월에 이스라엘군이 PLO의 군사 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자신이 바라는 유대 민족의 피난처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군사적 방향으로, 미숙한 방식의 파시즘적 방향으로 바뀌어 공격적인 의미에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레비는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밖의 존재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국가가 그 이웃에 취하는 태도는 그의 양심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곤란에 빠졌을 때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레비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 몇몇에게서 "그동안 유대인이 흘린 피에 눈을 감고 있다"는 '비수를 꽃는 듯한' 편지를 받기도 했다.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pp. 258-261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1 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만 한다.

Primo Levi, La Republica, 24 SEP 1982,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구역에서의 대학살2 에 관한 잠파올로 판사와의 대담 중에서 발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プリ-モ ·レ-ヴィへの旅
서경식 지음 / 박광현 옮김
창비, 2006


주기율표 Il sistema periodico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돌베게, 2007



(책에는 없는 궁시렁의 주석)
  1. 1977년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고, 이집트와의 평화 교섭으로 1978년 사다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82년 레바논을 침공했고 이스라엘군이 관할하던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어진 학살을 묵인하고 방치한 일로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Nazisrael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본문으로]
  2. PLO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9월 15일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를 점령한 다음날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친이스라엘파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했다. PLO의 발표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3200명 이상에 이른다. 이스라엘 정부가 파견한 진상 조사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의 간접적 책임이 있다. 위원회는 샤론의 공직 진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결론냈지만 샤론은 약 20년 뒤 총리가 되었다. [본문으로]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부류가 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운영하는 고도원님도 그 중 한 명이다. 200만명의 아침을 여는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그가 평소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었던 좋은 글귀에서 끊임 없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책 읽고 밑줄 긋기 대회도 열린다.

책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책을 읽고 밑줄을 긋는 것입니다. 깊은 뜻과 감동, 영혼을 울리는 글을 놓치지 않고 밑줄을 그어 놓으면, 그 책과 밑줄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두고 두고 말을 해 줍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는 건 그 책이 자기 것일 때나 그러는 거지, 여러 사람이 같이 보는 도서관의 책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 일단 자신의 책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인 마냥 함부로(라고 쓰고 무단으로 라고 읽는다) 다뤄서는 안 될 뿐더러,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읽을 때 자연스레 밑줄을 친 부분에 관심이 분산되어 눈의 흐름이 끊겨 독서에 방해가 된다. 아무리 그 부분이 글의 맥을 짚는 중요한 부분이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책을 읽으며 지적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 뒤로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남이 떠먹여주는 밥을 먹어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밑줄을 긋나 묻지 말아야 하나? -_-


내가 빌린 에코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이런 식이었다. (왜, 아예 밑줄로 도배를 하지 그랬어?) 몇 장 넘겨보고 너무 짜증이 나서 사물함에 처박았다가;;;, 반납 날짜가 다가와서 오만군데 출몰하는 밑줄의 습격을 하나 하나 피해가며 읽고 있다.

당신 책 아니라고 이렇게 막 줄 긋고 노트까지 해댔수?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제발 남들도 좀 배려해 가면서 사쇼.

한국은행, "오만원", 한국조폐공사, 2009
한국은행, "십만원", 한국조폐공사, 2009


논의 대상인 이 두 작품은 2절판으로 된 숫자 총서(editions numerotées)다. 앞면과 뒷면 양면이 인쇄된 이 작품들은 역광에 비춰 보면 섬세하게 공들여 만든 귀중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장인의 작품으로 최고 기술을 뽐내고 있다. 다른 출판업자들이 이런 기술을 가지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고, 그럼에도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고도의 기술이다.
이 작품들은 수집가가 좋아할 만한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복사본이 인쇄되어 나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출판 결정이 수집가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가격은 많은 사람의 주머니 사정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에 넘쳐흐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금값으로만 산정되는(이런 표현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 작품들의 유통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애호가들은 시립도서관의 예에 따라(도서관의 책을 대출하듯이) 그것을 직접 소장하여 감탄의 눈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커다란 희생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작품에 물리적 손상이 가해져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이 손에서 저 손으로(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작품이 훼손되게 된다) 계속 유통되도록 하기 위해 다른 독자들에게 몹시 재빠르게 그것을 넘기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리로 대여하게 되면 그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며, 구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더 한층 노력하고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정가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얼마나 야심만만하게 기획되었는지 강조해 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작품의 내적인 가치로 평가되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작품들의 문체적 가치를 평가해 보자면 이 작품들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대중의 열광이 완전한 속임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혹은 투기를 목적으로 야기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마저 생기게 된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사 구조에 일관성이 없다. "오만원"에서 앞면에 신사임당의 얼굴 정반대쪽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내비치는 무늬의 그림은 '포도를 그린 치마' 혹은 심지어 '오천원 (제5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십만원"의 주요 소재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김구의 사진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혹시 이 황해도 출신 정치가와 어떤 식으로든 혈연관계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경우 우리는 너무나 쉽게 현학적인 알레고리에 빠져들 수 있다. 그건 "백범일지"를 지은 작가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과대평가이다(김구는 독립운동의 아버지이며, 따라서 국가의 아버지라고 운운하는 것은 뉴라이트가 보여주는 아주 위험한 삼단 논법이다). 일관성 없는 서사 구조는 독자에게 혼란만 줄 뿐이며 젊은이들의 취향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그로 인해 적어도 그 젊은이들과 그다지 교양이 풍부하지 않은 계층이 이런 작품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내용의 층위에서 관찰되는 비일관성이 형식적 오염의 측면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주위의 모든 장식은 매일마다 흥분제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본 환상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앙리 미쇼의 그림처럼 환각적이고 몽상적인 모양으로 도배되어 있는 마당에 초상화를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아예 사진을 붙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두 인물의 초상과 뒷면의 풍경은 저급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범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중도 좌파 정책에 대한 양보일까?) 소용돌이, 나선, 물결 모양의 구성을 통해 이 작품은 독자를 환각으로 이끌고 마음의 눈에 거짓된 가치와 사악한 허구의 창조물로 가득찬 우주를 보여주려는 단호한 결단력을 드러낸다. 기하학적 도형을 계속해서 반복함으로서 사상 또는 신의 속성을 그리려는 끈질긴 태도는(매 페이지마다 불교에서 유래한 게 분명한 눈부신 좌우 대칭 구조물이 네다섯 개씩은 등장한다) 무(無)의 형이상학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작품은 순수한 기호 그 자체이다. 이 기호에 우리는 동시대의 시학을 갖다 붙이는데, 이 종이들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 종이를 모아 말라르메의 "책"처럼 잠재적으로 무한한 책을 만들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다 쓸데없는 주장이다.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 기호는 그 자체의 무용성 속에서 소모될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숨어있지 않다 - 우리는 이런 의혹을 품을 수 있다.
이건 소비적인 현대 문화의 예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독자들이 이 작품에 보여 준 호의는 흉조처럼 보인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취향은 폐기의 미학, 즉, 소비의 미학을 감추고 있다. 우리 눈 앞에 나열된 복사본들은 일련 번호를 통해 그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 같지만그건 다 속임수다. 과시적 소비에 대한 요즈음의 미학적 취향이 곧 독자들에게 더 많은 복사본, 다른 견본을 찾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교환하면서 한 개의 견본에서는 얻을 수 없는 보증을 얻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기호의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이 각각의 작품은 현실에서 우리의 관심을  떼어놓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이 작품의 환각적인 전위주의가 아주 뿌리 깊은 소외를 은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의 리얼리즘은 위조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서평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복사본을 세 개씩 보내 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원래는 "작은 일기"에 수록된 '희한한 세 개의 비평' 중에 1967년 처음 발행한 5만리라와 10만리라를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켜 관찰함으로써 물신 숭배 사상이 팽배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꼬집는 글이었다. 우리나라도 내년에 5만원과 10만원 지폐가 발행될 예정이니 지폐의 디자인을 묘사한 부분만 머리를 쥐어짜 바꿔 보았다.

그건 그렇고, 도서관에서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 움베르토 에코의 즐거운 상상 06"이라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제목의 책이 있길래 펼쳐 봤더니, 내용이 "작은 일기"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같은 책을 제목만 바꿔서 낼 수 있지??? 하면서 살펴보니, 그 책은 영어판을 번역해 놓았고 95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작은 일기는 이탈리아어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도 빌려서 두 권을 비교해 보니 아무리 영어 중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나라 이외의 문화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미쿡인들을 위해 움베르토 에코가 세심하게 배려해 인명과 지명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샤샥 바꾼 부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용 자체가 다른 곳이 많은지! 이 글만 하더라도 이현경씨의 번역은 물리적 손상을 막기 위해 돈을 빠른 속도로 유통시키며 고리로 빌려줄 경우 가치가 높아진다고 되어있는데 안수진씨의 영어 중역은 자꾸 써서 닳고 찢어진 돈이 오히려 더 귀중해진다고 쓰고 있다. 누구의 번역이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다. @_@
문체는 안수진씨의 영어 중역이 좀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포 강 유역 평야 사회에서의 산업과 성적 억압(이 책에서는 포 강 유역이 어디인지 모르는 한국 독자를 위해(?) 북부 이탈리아로 번역해 놓았지만)'에서는 밀라노와 파리의 지리를 알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친절하게 그림을 곁들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도와준다. (길 이름만 계속 나열한 이현경씨의 번역덕택에 나는 구글맵스를 계속 들여다 보며 동선을 쫓아가야만 했다) 이 외에도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번역했다는 옮긴이의 변명과 부합하듯이 영어 중역은 역시 학구적 지식이 부족한 한국 독자의 수준에 맞춘 듯 옮긴이의 설명이 좀 더 자주 등장한다.

그래도 책 번역은 원작자의 언어 그대로 번역하는 게 제일 바람직하다. 바우돌리노가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은 왜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 전날의 섬을 번역한 이윤기가 아니라 이현경이라는 모르는 사람이 번역해서 책장이 안 넘어가네 글이 딱딱하네 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는데, 나는 오히려 드디어 이탈리아어를 한국어로 바로 번역한 책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문학 상당수가 일본어 중역이어서 오역은 물론이고 일본어 어휘를 무분별하게 그대로 들여와 한국어가 오염되는 문제가 있었듯이) 아무리 영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다고 해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 자체에서 유실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를 둘러싼 번역 이야기"(공교롭게도 이 책은 일본어 중역이다)에 실린 '번역에서의 누락과 삭제에 관하여'를 보면 장미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생략된 부분이 등장하길래 찾아 봤더니 당연히 한국어판에도 그 부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는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도 프랑스어 중역본이 들어온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조그만 차이가 문화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기 Diario Minimo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이현경 옮김
열린책들, 2004
Milano, Bompiani, 1975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Misreadings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안수진 옮김, 조형준 해설
새물결, 1995/2005
New York, Harcourt Brace & Company, 1993

많은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자가 매우 탁월하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 속에 우리의 자녀를 치열한 경쟁 구도에 몰아넣는 일에 모두가 합심이 되어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경쟁에 강력히 반발하거나 경쟁의 결과가 희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 광기 어린 경쟁의 도가니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다른 교육 체계로 자녀를 내보내는 부모들이 늘어가는것은, 탁월함을 추구하되 그릇된 방법을 선택한 우리의 집단적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왜 이렇게 집단적으로 어리석을까? 그것은 현재 이 사회의 중견들이 모두 베이비붐 세대이기 때문이다. 한 반에 많게는 80여 명이 앉아 수업을 들은 베이비붐 세대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치열한 대학입시를 치렀고, 아마 그런 관점에서 고등학교 졸업생으로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실력이 뛰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 남을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탁월함이 있지만, 이기고 나면 더 이상 열심히 무엇을 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승리했고 목표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남을 이길 능력이 있으나 경쟁이 아니면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사람들이 탁월함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왔지만, IMF의 추운 계절은 이들을 길거리로 내몰았고, 그 논리도 모두가 경쟁이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인생의 최대 가치였기에, 경쟁에서 밀렸을 때 물러나는 것이 정의라고 받아들여야 했던 비극의 세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이 살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오늘 내가 경쟁에 밀렸지만 우리 애들만큼은 경쟁에서 밀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아이들을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몰아치는 것이다.
이제 인구가 줄어 학생들은 과거 베이비붐 세대만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학부모가 된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의 자녀를 동원해 대리전을 치르게 하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사교육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는 정부의 정책에도 문제가 있지만 백약이 무효인 경쟁 심리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런 경쟁의 논리와 그 긴박함에서 벗어나 목표에 집중하고, 자기만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한 경쟁이란 결국 영원한 승리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런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교육도 시험 성적이 남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를 얼마나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제시했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이재영,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pp. 31-41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들의 노트
이재영
한티미디어, 2008



택시 기사들과 얽힌 모험은 흥미롭기로 뉴욕을 따라올 곳이 없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뉴욕에는 온갖 출신과 언어, 피부 색깔의 택시 기사가 있다. 표찰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그 기사가 터키 사람인지, 말레이시아 사람인지, 그리스 사람인지, 러시아계 유대인인지 알아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라디오와 연결되어 있는데, 방송은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노래를 방송한다. 때로는 빌리지에서 센트럴파크까지 가는 것이 마치 카트만두로 여행하는 듯하다.
두 번째로 뉴욕에서는 평생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직업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 실직한 은행원, 갓 이민 온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택시 기사 자리는 집단으로 계승된다. 어느 시기에는 대다수가 그리스 사람이고, 다음에는 모두 파키스탄 사람, 그 다음에는 모두 푸에르토 리코 사람 등이다. 따라서 이민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고, 또 여러 인종의 성공에 대해 관찰할 수도 있다. 어느 집단이 택시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그들이 성공하고 있으며, 소문이 돌아 모두 담배 가게나 야채 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며,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옮겨 가고 있으며, 그들의 사회적 단계가 상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심리적 차이를 제외하면(히스테릭한 사람, 아주 친절한 사람, 정치적 참여자, 무엇인가에 반대하는 사람 등이 있다), 택시는 최고의 사회학 관측소다.
지난 주 나는 어느 유색인이 모는 택시에 타게 되었는데,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 기사는 자신이 파키스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고(뉴욕에서는 언제나 누군가 다른 곳에서 온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해댔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이해한 바로는,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한국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도 몰랐다(대개 택시 기사에게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쓴다고 말하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제 온 세상이 영어로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한반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가운데에 산들이 있고, 주위에는 해변이 많이 있고, 아름다운 섬이 많이 있다고. 그는 우리 인구가 몇 명이냐고 물었고, 그렇게 적은 숫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우리가 모두 황인인지 아니면 혼혈 인종인지 물었고, 나는 원래 완전히 황인 국가였으나 지금은 외국인이 약간 있지만 어쨌든 미국보다는 적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그는 파키스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어했고, 아마 약간은 있지만 필리핀이나 중국 사람들보다는 적다는 말을 듣고는 실망하는 표정이었고,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를 피하는지 자문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말실수를 했다. 나는 인도인도 조금 있다고 말했고, 그는 증오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토록 상이한 두 국민을 한데 묶어 놓았고, 또 그토록 불쾌하게 열등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우리의 적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미안한데, 뭐라고요? 하고 묻자, 그는 인내심 있게 우리가 영토 회복, 인종적 증오, 끊임없는 국경 침범 등으로 인해 현재 어떤 국민과 전쟁 중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인내심 있게 우리의 역사적 적들, 즉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그런 적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우리는 적이 없다고, 마지막 전쟁은 벌써 55년 전에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그 때는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이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쟁을 했다고. 그는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적이 없는 국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일은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우리의 무감각한 평화주의에 대한 보상의 표시로 팁을 2달러 주고 내렸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에스프리 드 레스칼리에esprit de l'escalier라고 부르는 현상, 즉 누군가와 이야기한 다음 계단을 내려와서야 갑자기 그에게 말했어야 하지만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문장이 떠오르는 현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사실 한국인들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다. 한국인들은 외부의 적이든 뭐든 누가 적인지 설정하는 데 전혀 합의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내부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다. 예전에는 도시 대 도시, 주류 학파와 비주류 학파, 다음에는 계급 대 계급, 정당 대 정당, 정당의 한 파벌 대 같은 정당의 다른 파벌, 그 다음에는 지방 대 지방, 마지막으로 정부 대 경제권력, 신문 대 신문, 개신교 대 다른 종교, 보수 대 진보의 전쟁이다.
그랬다면 혹시 그 택시 기사는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적이 없는 나라에 속해 있다는 보기 흉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1996)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제 2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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