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그제나 어제 보냈어야 마땅한 메일을 오늘 저녁 9시에나 그것도 코웃음이 펑펑 나올 정도로 영양가 없는 상태로 보내고 집에 가려다 화장실을 쓰려고 중도로 발길을 옮겼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35% 밝기에 불과한 핸펀 액정의 학생증 QR코드를 출입기가 인식하지 못해서 밝기를 100%로 끌어 올린 다음에야 입장.
그리고 중도 리모델링 이후 처음 써 보는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응? 난생 처음 보는 자동문 센서가 달려 있네? 손이 그려져 있어서 손을 대면 열리는 건가 하고 손을 갖다 댔는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지? 하면서 두꺼운 반투명 유리 (아무리 봐도 자동)문을 손으로 잡고 당기는 순간, 뒤에서 다른 사람이 접근해와 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문을 안 열지 내가 열어야겠네 하며 현대문명의 이기에 익숙하지 않아 양변기에서 밥 지을 물을 뜨는 원시인 취급을 받을 것 같다는 어처구니 없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황급히 이 볼썽사나운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재빨리 다시 손이 그려진 센서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이 모든 게 대략 0.7초만에 일어났다.

다행히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직 '제 옆에 손이 그려진 센서에 손가락을 갖다대면 제가 행복한 마음으로 열린답니다' 하고 말하는 문이 발명되지 않아 다행이다;;;)

어쩐지 약간 부끄러워서 휘리릭 가장 안 쪽에 있는 변기 앞에 서(쓸데없는 정황 묘사 생략)서 이 (나 혼자) 창피한 상황을 궁시렁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손을 씻으려고 손을 수도꼭지 밑에 갖다댔는데 물이 안 나오길래 손잡이를 올려서 물을 틀고 문은 자동문인데 수도꼭지는 왜 자동이 아닐까 웃기네 하고 0.15초 동안 생각한 다음 화장실에 들어올 때와 똑같이 손이 그려진 센서에 손가락을 대고 이번에는 한 번에 성공적으로 문을 연 뒤 화장실에서 나와서 중도에 널린 아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학번과 비밀번호를 치고 컴퓨터를 쓰려다, 공용컴퓨터를 쓰려면 자리를 먼저 잡아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당연한 진리를 어처구니없이 망각한 것을 깨닫고 다시 0.8초 동안 창피해한 뒤 자리를 잡고 지금 궁시렁을 쓰고 있다.


이 모든 게 2012년에는 트윗질 한 방이면 끝날 일이지만, 어쩐지 별 것도 아닌 시시껄렁한 일을 길게 늘어뜰이는 예전 습성(?)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물론 궁시렁을 다 써놓고 제목을 뭐라고 하지... 하고 고민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트위터나 페북은 제목이 없는 게 참 쓰기 편하다ㅋ)

뭐여 이 꼬부렁꼬부렁은... 지렁이여 글씨여?


오랜만에 돌아온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 시리즈.

여러 사람이 콩알만한 불만과 의구심을 가지고 조금 궁금하기는 한데 꼭 굳이 정체를 파헤치고 싶지는 않은 궁시렁의 영 이해하기 짜증나는 습성:

왜 메모를 영어로 해?!? (예전에도 등장했던 바냐님의 관련 트윗질 참조)

일단 답은 : 쓰기 쉬우니까.

잠깐만요. 금방이라도 알아서 터질 것 같은 토마토, 삶지도 않았는데 벌써 상한 달걀, 잡귀를 물리친다는 왕소금, 신고 있던 신발, 그 신발이 툭툭 치던 돌멩이, 기타등등 주위에 집어던질만한 것들이 있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분노와 역정과 짜증을 깔끔하게 처리하시라고 댓글 창이라는 분리수거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 다시 맨 처음에 거대한 낯짝을 들이민 저 다이어리 메모 스캔을 들여다 보면, 왼쪽은 대기권 최상층을 가볍게 부르르 떨며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식판(뭐라고 불러야 함?)에 놓고 끄적인 메모, 오른쪽은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끄적인 메모다.
(아, 혹시나 오해할까봐 미리 얘기하는데, 저 글씨 잘 써요. (응?) 음... 옛날엔 잘 썼어요. (응??) 음... 특정한 경우 팔에 엄청난 힘을 주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면 모두가 만족하는 어른 같은 글씨를 썼고, 보통 때는 어른들이 싫어하는 둥글고 각진 글씨를 썼어요. (이쯤해서 등장하면 짜고 친다고 또 돌을 던질 것 같은 매치어님의 보충 발언 : 택배 상자에 씌인 글씨로는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명바기의 안사람이 어린이날이라고 동자승을 자기 집에 초청해 양도 별로 없는데 질소로 빵빵하게 부풀리기만 한 포장에 나트륨만 잔뜩 묻힌 저질 과자에 식용색소가 다 녹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설탕물을 먹이면서 좋다고 히죽대는 게 아니라 유기농 밀가루로 반죽을 빚어 직접 구운 따뜻한 쿠키와 텃밭에서 딴 과일을 손수 갈아 만든 영양만점 생과일 주스를 대접하는 일보다 아주 조금 더 자주 일어날 뿐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누군가는 질책하고 누군가는 예쁘다고 하는 글씨체는 점점 그 명맥이 끊기고 있을 뿐이랍니다)
어쨌거나, 정상적으로 글씨를 적기 어려운 환경(이를테면 걸어가며 다이어리만 든 상태에서 메모를 해야 한다던가)에서는 글자마다 획이 떨어진 한글보다 안 먹고는 못산다는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국수처럼 후루룩 쓸 수 있는 알파벳이 메모에 훨씬 적당하(다고 적어도 나는 주장한)다. (물론 그 상태에서는 적어가며 메모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리고 책상에 편안히 앉은 상태에서도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 또박또박 적어야 하(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글자와 글자를 이어서 쓰려면 나중에 오히려 더 판독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한글과는 달리, 뭐가 잘났다고 한 언어를 머리 속에서 다른 언어로 변환한 뒤 그걸 좋다고 휘리릭 적는 쓸데없이 복잡하고 끔찍하게 효율이 떨어지는 체계를 별 뚜렷한 근거도 없이 선호한다.


- 이봐, 당신이 당신 입, 아니, 그러니까 손, 아니 뭐 어쨌거나 한국어를 영어로 옮겼다가 그걸 보고 다시 한국어로 풀어놓는 과정에서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고 분량도 줄어들기도 한다며! 게다가 후루룩 갈겨썼다가 당신도 자기가 뭐라고 썼는지 몰라서 한참 헷갈릴 때도 있다며!
- 아, 물론 맞는 말인데요, 그보다 지금 바로 이 궁시렁도 어젯밤 자기 전 침대에서 터치팟으로 '영어로' 메모했다는 건 미리 알립니다. ㅋ
처음으로 시도하는 예약 등록. 이 글이 공개되는 시점에서 궁시렁은 바이칼 호수 위 대략 만 미터 상공을 850km/h로 날고 있다. ㅋ


뜬금없게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이 궁시렁은 아주 오래 전부터(그러니까 대략 두 달 전) 쓰려고 했던 것이다.

자기가 닮은 연예인은 누구인가? ㅡㅡㅋ

(아... 정말... 뜬금없고 영양가도 없고 재미도... 없나?)
참고로 이건 구글-텍큐닷컴 간담회가 끝나고 회색웃음님의 장기하를 쪼-끔 닮은 것 같기도 하다는 댓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ㅋㅋㅋ

사실 나는 연예인 닮은 꼴을 찾기 어려운 얼굴인데, 지금껏 그나마 싱크로 조금 된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묘한 말투의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ㅡㅡ;;; (정신 세계도? 쿨럭...;;;)
어디 가서 유진 박 닮았대- 라고 말을 꺼내면 싸늘한 반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개 ㅋㅋㅋ 하면서 잘만 웃어 준다. ㅋㅋㅋ

모야, 나 불뤄썸?

그런데 유진 박 요즘 뭐하나? 음반도 안 내고- 영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네. 한국에 없나? 배도 좀 나왔네? (이것도 닮은 거임? -_-)

그리고 저번에 헤헤가 생각해낸 복학생 옵화 이미지의 선두주자, 유리상자의 이세준.

나 이래 봬도 유부남이야-

엄훠 동안이네 어쩌네 해도 넘을 수 없는 복학생의 벽. ㅡㅡㅋ 나랑 비슷한 사진을 찾아봤지만 뭐 마땅한 게 없다. ㅋ

그리고 장기하. -ㅅ-

궁시렁은 싸구려 커피 취급하지 않습니다.

뭐야...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설득력 있어... (응?) 친구들에게 '나 장기하 닮았다고 누가 그랬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ㅋㅋㅋ



+ 그래서 던져보는 바통

어때요, 재밌지 않겠음까? ㅎㅎㅎ 인증샷 올리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와 닮은 연예인이 누가 있는지 한 번 트랙백 날려 보아요- 잇힝-
(빈에 도착해서 트랙백 없으면 힐튼 호텔이 떠나가라 한숨 쉴 거임 ㄲ)

아놔... 노엘님 처럼 '이거 보면 무조건 트랙백 발사'라는 조건이라도 달아야 하나? ㅎㅎ


++ 세상에 이걸 빼먹다니 ㅡㅡㅋㅋㅋ

승리의 장만옥 ㅋㅋㅋ


2년 전에 물론 해봤지롱- 설명 및 변명은 생략. ㅡㅡㅋㅋㅋ
그 때는 로그인 안 해도 마음대로 만들어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회원 가입 하라고 나오니까 링크는 생략.

나야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이름이라 익숙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KLM을 언급하면 가장 많이 보이는 반응.

그게 뭔데?

네덜란드 항공이라고 얘기해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 OTL
이유가 뭘까? 이름에 '에어'나 '항공' 뭐 이런 게 없어서 그런가? 그런 걸로 따지면 미쿡 항공사들도 마찬가지고...
약자를 써서 이름을 사용해서 그런가? Koninklijke Luchtvaart Maatschappij, 그러니까 '(네덜란드) 왕립 항공사'의 약자 KLM인데... 하지만 약자 쓰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한국 아닌가? ㅋㅋㅋ 잉글랜드어 약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Royal Dutch Airlines를 줄여서 RDA라고 해도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를테지. ㅋ_ㅋ
오타도 많다. k, l, m이 키보드 오른쪽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치다가 보면 KML이 될 수도 있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KAM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샘플로 쓰인 띠용님 죄송- 굽신굽신)

KLM이 어쩌다가 항공사에 '왕립'이 붙게 되었는지, 세계 최초로 설립된 민간 항공사,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는 노선 운행, 세계 최초로 기내 승무원 도입 등등 세계 최초 시리즈가 얼마나 많은지, 뭐 이런 건 실제로 KLM에 그닥 생산적인 도움이 안 될테고- 나도 이런 걸로 왈가왈부 궁시렁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건 그냥... '이명박 이 *새끼 복수할 거야 이 개*끼야' 라고 말해선 안 된다고 알려주는 뜻에서 '이명박 이 개*끼 복수할 거야 이 *새끼야'를 인용해 '이명박 이 *새끼 복수할 거야 이 개*끼야'를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일 뿐임)

어쨌거나 KLM은 환승 전문(응?) 공항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을 허브로 둔 네덜란드 항공사고, 5년 전에 에어 프랑스와 합병해서 AF-KLM이라는 초대형 항공사가 되었지만 합병 이후에도 따로 제 갈 길 가는 현대와 기아 자동차처럼 언제 브랜드가 완전히 합쳐질지 알 수 없는 상태고, 그래서 이번에 에어 프랑스 여객기가 대서양에 침몰했을 때 할머니가 '저거 KLM 아니냐?'고 했을 때 아주 완전히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었고, 에어 프랑스와 합병하면서야 그동안 제휴관계에 있던 노스웨스트와 함께 뒤늦게(?) 스카이팀에 가입했는데, 에어 프랑스와 함께 플라잉 블루라는 마일리지 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하고(그래도 스카이팀 회원사를 이용한다면 써먹을 수 있음), 키다리가 많은 네덜란드의 특성상 190cm 이하만 승무원으로 뽑는 우월한 규정을 두고 있다.


뭐 결론은 그러니까 KLM이 무슨 회사인시 상식 수준에서라도 알아 주십사- 하는 거고,
그리고 진짜 결론은 저번에 들었을 때 미리 궁시렁대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당연히) 까먹고 있던 이벤트를 모래사장에서 쓰레기 줍는 정도로 알리고자... ㅋㅋㅋ

KLM이 신세계와 무슨 작당모의를 했는지 알고 싶진 않지만 이번 달에 KLM 웹사이트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면 신세계 상품권 3만원짜리를 주고, 우월한 비즈니스 클래스 표를 끊으면 이런 구질구질한 조건따위 걸지 않고 관대하게 10만원짜리 신세계 상품권을 준다. (물론 대신 물량이 적음 ㅋㅋㅋ)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당연히 이런 상품권을 주는 것 보다 그냥 요금을 할인해 주는 게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ㅋ_ㅋ
굳이 KLM이 아니어도 여러 항공사가 웹사이트에서 여러가지 프로모션을 진행하니 할인항공권 사이트만 검색하지 말고 검색 발품을 조금 팔아도 쓸만한 상품이나 할인 혜택을 건질 수 있다. (순전히 구글링하다가 15% 할인 프로모션을 움켜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궁시렁 ㄷㄷㄷ)
호어스트 에버스의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로 촉촉히 젖어있는 책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가 출판사를 바꿔 작년에 새로 출간된 걸 모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예전에 책을 샀기 때문에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 책 본문을 미리 보여주는 아마존을 따라하는 네이버 책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니 -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가 없다!!! 쿠쿵!!! 그냥 에필로그 1, 2로 바뀌어 버렸다!!! 쿠구궁!!!
아놔, 세상에, 이럴 수가, 기타 등등 경악에 해당하는 많은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으며 책을 살펴보니 그냥 출판사만 바뀐 게 아니라 번역도 다시 손질한 거였다. 여러 군데 살펴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네.

My Life as a Search Machine

그리고 호어스트 에버스의 새 책이 나왔다. 아마도 1년 반 쯤 뒤에 김혜은씨의 번역으로 작가정신에서 '검색기 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듯 하다.

우유

Life 2009. 4. 5. 01:27
방금 우유에 네스퀵을 타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성공적으로 학업을 중도에 접고 베를린의 여러 소극장 무대에 올라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는 호어스트 에버스의 작품집 중에 금요일에는 별로 읽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책의 끝부분에 있는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라는 멋진 문구를 주제로 궁시렁을 써야 겠다고 얼마나 오래 전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건 며칠 전에 잠이 들기 직전 생각했던 것을 키보드에 옮길 때가 된 것이다.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 이 아니 궁시렁과 일맥상통하지 않을소냐! (여기서 -소냐!를 가지고 스테이크를 만들기 위해 자살하는 소 따위를 가져다 씨알도 안 먹히는 더글러스 애덤스식 개그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함)

그래서 다시 우유로 돌아가면, 먼저, 방금 냉장고에는 1리터들이 우유 두 병이 있었는데, 한 병의 양이 미묘하게 적어서, 나는 할머니가 우유를 먹다가 모자라서 새 우유를 뜯어 병아리 눈물만큼 컵에 더 부었을 거라는 기막히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유를 먹으려고 유통기한이 좀 덜 남은 병, 그러니까 미묘하게 양이 적은 그 병의 뚜껑을 돌렸는데, 새 거였다. 두 병 다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1리터짜리 멀쩡한 우유였다! 똑같은 제품인데 양이 다르다니! 그런데 방금 이 내용을 쓰다보니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오늘, 그러니까 4월 4일까지인 우유가 아주 조금 남아있다는 게 기억났다. 누군가는 우유룰 한 컵 따른 뒤 병에 한 모금 정도 남는다면 그걸 그냥 단숨에 벌컥 마셔버리고 빈 병을 분리수거용 바구니에 던져넣을지도 모르지만, 남은 건 내일 마실 때 먼저 부으면 되니까 나는 당연히 한 줌도 안 되는 걸 냉장고에 도로 넣었던 건데, 방금 우유를 마실 때 새 병을 따기 전에 그걸 먼저 부었어야 했다-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는 FIFO를 성실히 이행해야 하니까.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가 자주 저지르는 부류의 어리석은 일 때문에 괜히 양이 더 길어졌는데, 다시 우유로 돌아가면, 부엌에 불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컵에 우유를 따랐기 때문에 컵에 우유를 아주 조금 더 많이 부어버려서 한 모금 마셨다. 바로 여기서 아이디어가 생각난 것이다. 나는 극히 최근까지 보통 흰 우유는 먹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흰 우유를 안 먹는다고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답하기로 한 것이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한국에는 제 무덤 제가 판다는 속담이 있다) 당연한 수순으로 왜?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내가 워낙 입이 짧으니 마땅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 궁시렁을 읽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입이 짧은 걸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굉장히 타당한 가정을 세우고 계속 진행하자면, 음- 딱히 마땅한 이유는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 저 먼 어린 시절 흰 우유의 맛에 화들짝 놀란 뇌와 혀가 혼연일치로 그 액체를 거부라고 위에게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물론 지금은 초딩이라고 하는데, 내가 졸업한 뒤에 바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면서 일재의 잔재를 하나 더 털어냈기 때문에 내 또래중에는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과거를 회상하면서 국민학교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걸 보면 가끔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국민학교라고 써봤음) 1학년 때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했는데, 나는 흰 우유를 먹지 않는데도 단순히 선생님이 우유 급식 신청서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한동안 먹지도 않는 우유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혹시 엄마가 흰 우유를 먹여보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신청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먹지도 않는 우유를 내 돈 내고(물론 공짜가 아니라는 의미만을 가짐) 받아서 야, 이거 너 먹어-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다. 흰 우유 대신 초코우유가 배달되던 날만 빼고.

사실 마일로와 네스퀵은 네슬레가의 형제임. ㅎ

흰 우유를 먹지 않으니까 엄마는 우유에 초컬릿 맛이 나는 가루를 섞어서 먹여보겠다는 멋진 시도를 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마일로라고, 그냥 가루만 먹어도 맛있는데 몸에 유익한 여러 성분까지 보너스로 들어있어서 아이들은 초코우유를 먹어서 좋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성공적으로 우유를 먹일 수 있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애들 좋고 부모 좋고 하는 제품이 있었다. 얄밉게도 아무 거나 주는 대로 안 먹고 버티는 궁시렁과 아무 거나 주는 대로 닥치고 잘 먹는 궁시렁의 동생 역시 우유에 마일로를 타서 주니 좋다고 먹었는데, 문제는 이 가루가 찬 우유에는 잘 안 녹는아서 바텐더마냥 우유와 마일로를 넣은 거대한(그래봤자 300 mL? ㅋ) 용기를 신나게 흔들어야 겨유 섞일락말락하는 점이었다. 위아래로 용기를 흔들다 뚜껑이 날아가면서 아직 초코우유로 변신하지 못한 불완전 상태의 혼합물이 마구 어지러진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골치를 단박에 해결해 준 영광스러운 제품이 바로 네스퀵이다.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겠지만 네스퀵은 이 궁시렁의 맨 첫 줄에 버젓이 등장한다) 마일로보다 맛은 덜하지만 어쨌거나 초컬릿 맛이 나고 휘휘 젓기만 하면 찬 우유에도 문제없이 녹아드는 이 신비한 가루(네스 아닌가!)를 나는 만 26세 4개월이 되도록 끊지 못하고 지금도 나는 유치원생마냥 우유를 먹을 때 꼭 네스퀵을 타서 먹는다. 물론 어엿한(얼씨구?) 성인이므로 흰 우유도 조금씩 먹을 수는 있는데, 이게 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목장의 신선함이 살아있는 서울우유가 아닌 경우에도 가능한지는 아직 실험해보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 아주 쵸-큼 고소한 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한다.
 
아놔...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와 제 무덤 제가 판다는 이렇게 어울리는 한 쌍인 것을! ㅋㅋㅋ (불길함;;;)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 얘기도 내친김에 해보면, 어렸을 땐 단 것 좋아하는 꼬마들이 대개 그렇듯 콘푸레이크를 거부하고 호랑이 기운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콘푸로스트를 먹었다. (물론 나에게는 고양이 기운만큼도 솟아나지 않았다) 콘푸로스트의 설탕 덩어리가 녹으면 달착지근하다고 아무 소리 않고 흰 우유를 먹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따가운 눈총) 조금씩 자라면서 고소한 아몬드 플레이크를 먹는 과도기를 거쳐,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지나치게 단 게 싫어진 뒤로는 현미나 오곡 플레이크를 먹는다. 켈로그는 웰빙 유행에 맞춰 곡물이야기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밀고 있다. 이번에 신제품도 나왔던데- 그걸 사 볼 걸 그랬나... ㅋ_ㅋ

일기장

Mostly Harmless 2008. 8. 21. 18:09
이제는 어린이가 더 이상 하나의 마법적 대상물(거기에 수많은 기억과 감동이 서린)에 거의 한 생애를 바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냉정해 보인다. 어떻게 일기장 없이, 또는 기념물도 없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안젤로 오르소 이야기, 1992



수많은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국민학교(아... 내가 국민학교의 마지막 세대인가?) 다닐 때 일기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방학 일기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등학교(낯간지럽군 -_-ㅋ) 일기장은 다 쓰기가 무섭게 (아마도 통쾌한 기분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기록을 보관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가끔 자신의 옛날 일기장을 스캔해서 올려놓는 블로그를 보면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적어도 사료(응?)의 역할은 충실히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충격적인(?) 기억은 1학년 때 가장 처음 썼던 일기이다. 밤에 엄마랑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탔는데, 내가 굉장히 높이까지 올라가서 엄마는 놀랐다- 는 서너줄 정도의 짧은 일기였는데, 셀 수 없이 사라지고 왜곡된 기억 중에 지금까지 뇌 한 구석에 이 기억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선생님이 내 일기를 보시고 일기에 제목을 붙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목(<놀이터> 였던 것 같다)을 붙였나며 굉장히 놀라셨기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처음 쓴 일기에 꺽쇠까지 붙여가며썼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무려 8살 때 일 아닌가!
그런데 좋은 기억은 이것 뿐이고, 나머지는 아빠가 일기를 검사하고 마구 혼내서 안 좋은 기억 뿐이다. 5학년 때는 중창부를 '가운데 창문'이라고 썼다가 혼났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노인은 낚시줄만 버리게 되었다.' 라고 썼다가 혼났다. 6학년 때는 미국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도이칠란트에 3:2로 진 경기를 일기에 쓰면서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썼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혼났다.
글씨를 제대로 안 쓴다고도 혼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내 글씨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피오피체와 개성체를 섞어놓은듯한 모습이었는데, 아빠는 궁서체로 쓰라고 버럭하고 으르렁대며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게 했다. 물론 나는 궁서체 글씨를 쓰라면 쓸 수 있었는데(4학년 때는 교실 뒤 조그만 칠판에 쓰기 책에나 나올법한 궁서체 글씨로 공지사항 같은 걸 쓰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왜 선생님은 자기가 안 쓰고 날 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손이 굉장히 아프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간단히 말해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데, 웃기는 건 감수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시기에 진입하다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일기장(얇은 공책 형태가 아니라 두꺼운 표지에 대략 정사각형 모양의 다이어리)에 공들여가며 비밀스런(!) 이야기를 끄적대더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펼쳐보면 신경질이 나서 뼈와 살을 분리시키고 싶을 정도로 유치찬란하다. -_-;;; 이런 건 그냥 고이 간직만 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ㅋ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너도 나도 다이어리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즉석 스티커 사진과 다이어리 꾸미기 전용 스티커가 유행하고 마치 방명록에 글 남기듯 남의 다이어리에 글을 써 주며(참나... 이게 뭐하는 짓이지? ㅋ) 갖가지 디자인의 속지, 엽서, 출처가 불분명한 책에서 따온 글, 친구들의 삐삐 번호가 적힌 전화번호부(응?)가 난무하던 때였다. 나는 지갑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갑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날마다 할 일과 한 일을 꼼꼼히 정리하던 시절은 2년 남짓이었고 특히 대학에 입학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나서는(특히 궁시렁 게시판) 다이어리는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두꺼운 지갑(그렇지만 모든 것이 들어있는)과 동의어가 되었다. 쓰지 않아도 관습적으로나마 달고 다니던 주간 일정(올해와 작년 아카이브를 합쳐 대략 52장 필요)은 3학년이 되면서 간편한 월간 일정(13장 필요)으로 바꿔 버렸다.

작년에 9년 동안 들고 다닌 다이어리를 영영 잃어버린 이후로는 난생 처음 지갑을 쓰고 있다. 하지만 한동안 손이 허전하던 걸 빼면 불편한 건 없다. 아카이브의 역할은 제로보드가, 이제는 포맷을 바꿔 블로그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질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어 제 기능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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