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공허한 얼굴로, 이렇게 머리를 빡빡 민 채, 이렇게 부끄러운 옷차림으로 화학시험을 보다니. 금발의 아리아인 독토어(Doktor) 앞으로 나가서, 물론 도이치어로 볼 것이다. 시험을 볼 동안 코를 풀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그 독토어가 우리에게 손수건이 없다는 걸 모를 수도 있고, 또 우리도 분명 그걸 설명하지도 못할 테니까. 두 다리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도이칠란트인들은 화학자가 그렇게 필요한 걸까? 아니면 이건 또 다른 속임수, "pour faire chier les Juifs"(유대인을 멸시하기 위한) 새로운 음모일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우리에게, 무無에 대한 황량한 기다림 속에서 이미 반쯤 미쳐버린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보게 한다는 게 그로테스크하고도 부조리하다는 걸 알까?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p. 157



이것이 인간인가 Se questo è un uomo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돌베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