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법칙

And Everything 2008. 8. 28. 15:58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데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그 누구도 이제는 자기 직업을 수행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자기 직업을 잘 수행할 때 놀라기도 한다. 군복을 입은 깡패들이 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시민들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경찰관이 깡패에게 맞은 시민이 아니라 군복을 입은 사람을 붙잡을 때 경찰의 전문성을 칭찬하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로 전 세계에는 자기가 직업으로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은 널리 알려진 피터의 법칙 때문이다. 피터의 법칙은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렌스 피터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대기업 또는 특히 공공기업에서 피고용인이 무능력의 수준까지 승진하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즉 특정 분야의 일을 잘 해내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게 되고 다른 분야까지 담당하게 됨으로써, 직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능률과 효율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무능력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츠키야마는 훌륭한 포크레인 운전수인데 인사 책임자로 승진하게 되면, 땅을 파는데는 아주 유능한 츠키야마가 조직 관리에는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터의 법칙이 말하듯이, 회사 조직에서는 규정상 각자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종 한국의 대통령은 선거 운동 조직에서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물을 공공기업의 이사나 금융회사의 회장으로 임명하기도 하며, 따라서 많은 공공기업 이사들이 통상적인 업무를 잘 모르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릇된 전문성 의식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부정부패의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즉 누군가에게 혜택을 주거나 또는 제거하기 위해 그가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도록(돈도 더 많이 주면서) 자리를 옮기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파산 신청자에게 증권 시장 관리를 맡겼고, 청와대의 어느 고위 경제 관리가 해임되었을 때 그에게 OECD 대사를 맡기기도 했다.
국제적 버전의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자기 능력 밖의 일을 수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도 무능력하다고 증명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허락한 것을 가리킨다.



움베르토 에코(1993)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