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19세기의 세계는 시장에서의 교환으로 경제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온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제시대의 도래이다. 인간과 자연은 공장이 항상 이상적 가격에 이상적 수량을 생산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5분 대기조로 봉사하는 투입물이 되어야 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쏘아붙인 대로, 이제 그 공장은 인간과 자연을 갈아 마셔버리는 악마의 맷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을 어느 때이건 또 얼마만큼이건 그 악마의 맷돌이 맘껏 포식할 수 있도록 쉽게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화폐만 내면 마음껏 구입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서 노동시장과 원자재 및 곡물 시장을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원래 인간과 자연은 상품이 될 수가 없다. 상품이란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조물주가 언제 판매를 목적으로 토지와 공기를 만들었으며, 인간이 언제 판매를 목적으로 새끼를 낳기 시작했는가. 이것들을 상품인 것처럼 거래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노동', 자연에 '토지 및 원자재'라는 가면을 씌우고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우겨야 한다. 이 노동, 토지, 그리고 화폐조차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 허구'에 기초하여 성립한 가면극이 바로 19세기에 나타난 시장 자본주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구는 어디까지나 허구다. 인간은 인간이며,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이것을 상품이라고 우겨서 마음껏 사고 팔 수 있게 되면, 인간도 자연도 끔찍한 고통 앞에 발가벗겨 던져지게 된다. 예컨대 누구나 떠들어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고용주가 상품에 불과한 노동력을 맘껏 사고 팔 수 있는, 즉 필요에 따라 맘껏 고용했다가 맘껏 해고할 수 있는 자유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위시한 경제학과 교수들은 어째서 종신고용제(tenure)라는 철밥통을 차고 살았던 것일까. 만약 대학의 종신고용제를 없애겠다고 하면 그들은 순순히 받아들일까? 혹시 머리띠 두르고 '노가다'들 마냥 파업 농성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국제통화기금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전선으로 밀려 나오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 대학교와 정당과 예술과 산과 강과 들판 모두의 이름과 성격을 결정지은 주체는 현금 수익의 흐름의 논리를 앞세운 대기업과 외국 투자자였다. 삼성이 원하는 이상적 대학의 모습은 전국의 대학 교육에 하나의 헌장을 제시한 셈이고, 심지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며 비분강개하던 어느 대학교 인문대 교수들이 앞장서서 추구하는 충성의 대상이 되었고, 이상적인 대통령은 어느새 CEO 대통령이라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고, 나라 전체의 살림살이는 대기업이 투자하고 싶은 조건 창출이라는 것이 마치 과학적 법칙처럼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면무도회에는 엄혹한 네메시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폴라니의 책 "거대한 변형"이 함축하는 바이다. 시장이든 대기업이든 인간과 자연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이름과 성격을 어거지로 마구 뒤집어씌운다면 인간도 자연도 처음에는 그 가소성과 인내심의 극한까지 내몰리게 되겠지만, 일정한 선을 넘게 되면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회 전체가 실업, 가계 부채, 부동산 위기,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로 시달리는 상황에서 '일등 기업'이니 '글로벌 경영'이니 하는 꿈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 가능'할까. 혹시 또 다른 '거대한 변형'이 21세기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홍기빈 (사단법인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고전의 향연
이진경, 이정우, 박혜영, 안광복 외 지음
한겨례 출판사, 2007